노무현 대통령은 얼마 전 캐나다 보수당 정권의 예를 들며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긴 호흡에서 국가에 필요한 일을 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 이 보도를 접하면서 떠오른 생각은 과연 역사는 노무현 정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직 임기가 2년 이상 남아있기에 이에 대해 단정적으로 답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다만 노무현 정부가 나름의 공도 있고 과도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과실로 기록될 것 중의 하나는 부안 사태이다. 노무현 정부는 참여정부를 자칭하면서도 주민참여를 배제한 밀실 행정에 의해 핵 폐기장 설치 장소를 전북 부안으로 정했다.
그리고 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밀리면 안 된다”는 오기 정치에 의해 불과 인구 2만 5,000 명이 살고 있는 읍에 1만 2,000 명의 전경을 동원해 이를 강제하려 함으로써 한 때 부안을 ‘제2의 광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오기 정치도 주민들의 저항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방폐장 선정의 양면성
이 같은 우여곡절을 겪은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이 지난주 일단 경주로 결정됐다. 부안 사태 이후 정부는 핵 폐기장 설치 지역에 특별지원금 3,000억 원과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양성자 가속기 건설 등을 지원한다는 파격적인 매수 전략을 펴는 한편 주민 찬성률이 가장 높은 지역을 선정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군산 등 4개 신청지역 중 경주가 가장 높은 89.5%의 찬성률을 보인 것이다.
이를 바라보는 심정은 양면적이다. 우선 이번 투표는 역사상 처음으로 주요 국책사업을 주민투표에 의해 결정한 것으로 1980년 광주를 떠오르게 했던 부안을 생각하면 풀뿌리 민주주의가 진일보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쪽 이야기, 아니 4분의 1쪽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선, 풀뿌리 민주주의의 전진은 반쪽, 그것도 위험한 반쪽의 전진일 뿐이다. 정부는 부안 사태에도 불구하고 핵 에너지가 더 필요한 것인지, 또 핵 폐기장이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국민적 논의를 조직화한 것이 아니라 밀실에서 결정된 기존의 핵 폐기장 정책을 기정사실로 해서 단지 이에 사탕을 발라 주민투표에 부쳤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를 돈으로 산 것이다. 나아가 떡고물이 커지자 지방자치단체들은 투표율과 찬성률을 높이기 위해 유치위원회를 만들어 예산을 써가며 직접 관권 부정선거에 앞장섰다. 공무원들의 선거운동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청, 시청 공무원은 말할 것도 없고 반장, 이장들까지 직접 나서 관권 부정선거를 했다고 한다.
부재자 투표 신청 기간에는 각 지방자치단체가 공무원에게 할당을 주는 동원 체제를 가동해 보통 2~3%에 그치는 부재자 투표율이 40%에 육박했다. 특히 많은 경우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지자체 관계자가 부재자 투표 등록을 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투표 과정을 지켜본 반핵국민행동은 “유례가 없는 최악의 부정선거”라고 논평했고, 지역 환경 단체들은 주민투표 무효소송을 내겠다고 벼르고 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유치 경쟁이 과열하면서 망국적인 지역감정 대결로 비화했다는 점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찬성률을 높이기 위해 군산시 전역에 “부안이 피 흘려 쟁취한 것을 경상도에 줄 것인가”라는 현수막이 내걸렸고, 경주시도 지역감정을 자극하기 위해 군산시의 현수막을 그대로 옮겨 시내에 걸어 놨다고 한다. 나아가 80년 광주 때와 마찬가지로 지역감정이 ‘빨갱이’라는 색깔론 시비로까지 비화했다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정부가 지역대결 유도
정부는 폐기장 문제를 이권 사업으로 전락시키고 안전성 문제를 젖혀두고 찬성률을 선정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사실상 지역주의를 유도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제 국책사업을 놓고 지자체들이 직접 나서 부정선거를 주도하는 시대가 왔으니 경주시에 “축! 관권 부정선거 콘테스트 우승”이라는 축하 현수막이라도 보내줘야 하는 것이 아닌지?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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