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만에 한국에 온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 베를린필의 수석지휘자 겸 음악감독 사이먼 래틀(50)이 첫 공연 전날인 6일 기자들을 만났다. 작은 체구에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미소, 반짝이는 곱슬머리 은발의 이 지휘자는 차분하지만 열정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아시아는 유구하고 훌륭한 음악의 역사를 가지고 있죠. 좋은 음악가도 참 많고요.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고 윤이상,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진은숙 같은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정경화, 지휘자 정명훈 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아시아 순회공연은 아시아를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그것은 베를린필의 미래에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베를린필 외에 조국인 영국에서 시대악기 원전연주 단체인 계몽시대 오케스트라, 버밍햄 현대음악그룹도 이끌고 있다. 베토벤, 브람스 같은 고전낭만 음악 뿐 아니라 바흐 이전의 옛 음악과 오늘의 새 음악을 모두 아우르는 그의 이러한 개방성은, 2002년 9월부터 맡고 있는 베를린필에서도 현대음악의 비중을 늘려가는 등 주목할 만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현대음악을 낯설어 하는 건 베를린에서도 마찬가지죠. 예컨대, 이번 투어에 포함된 영국 작곡가 토머스 아데의 ‘Asyla’를 연주했을 때, 좋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렵다는 반응도 있었죠. 이 곡은 매우 아름답지만, 전위적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음악이라도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베토벤도 당대에는 그랬어요. 3번 교향곡 ‘영웅’에 대해서는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냐는 혹평까지 있었으니까요.”
그가 베를린필에서 시작한 핵심 프로젝트는 교육 프로그램 ‘Zukunft@Bpil’ (‘Zukunft’는 ‘미래’라는 뜻)이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악기 연주 같은 음악적 기술을 전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음악을 닿게 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도록 함으로써 각자의 내면에서 창조성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테면 교도소 수감자들이 바그너 오페라 ‘라인의 황금’을 그들만의 버전으로 만들고 이를 무성영화로 제작한다든지, 아이들이 아폴리네르 등 여러 시인의 시를 대본으로 작곡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4번을 배우면서 자신들이 쓴 시로 새로 텍스트를 만들고, 그것으로 다시 음악을 만들어내는 등 대담하고 혁신적인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는 ‘음악은 결코 사치가 아니라 삶의 일부이며 모든 사람의 것‘이라는 그의 철학과 신념이 깔려있다.
“누구나 음악을 만들 수 있고, 작곡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어요. 아이들에게 운동을 가르칠 때, 축구공을 갖고 놀게 하거나 테니스 라켓을 쥐어주지 구경만 하라고 하진 않죠. 그런데, 아이들을 음악에 끌어들일 때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하죠. 그건 올바른 방식이 아닙니다.”
그는 베를린필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표현했다. “베를린필은 앙상블과 단원 개개인의 역량에서 세계 최고입니다. 깊은 땅 속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고 물결 치는 듯한 사운드를 갖고 있죠. 또 아주 젊은 오케스트라이기도 합니다. (베를린필은 많이 젊어졌다. 단원 평균 연령 38세. 21년 전 왔던 단원은 30여명만 남아있다.) 베를린필은 21세기 오케스트라를 지향합니다.
사진=왕태석기자 글=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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