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덕꾸덕 가을이 마르고 있다.
그 새 차가워진 날씨. 옷깃을 섬칫 파고드는 바람에서 북국의 냉기가 느껴진다. 스산해진 바람으로 으슬으슬해질 때면 지글지글 끓는 구들장이 떠오른다. 몸이 움츠러들수록 마음은 따뜻한 옛 기억으로, 고향으로 향한다.
충북 영동이 그런 곳이다. 태백 준령의 강원이나 경북 못지않은 험한 산세 탓에 아직까지 손이 덜 탔다. 기억속 아스라한 ‘고향’의 순수함이 남아있는 땅이다.
지난 계절 포도 향 짙게 드리웠던 영동. 지금, 노랗게 익은 감들이 뿜어내는 여유로운 빛으로 아늑하다. 감나무 가지 끝 까치밥으로 남아 주렁주렁, 농부의 낡은 집 흙벽에 곶감으로 매달려 주렁주렁…. 영동의 가을은 그렇게 익어 간다.
영동에서도 오지의 분위기 가장 물씬한 상촌면과 용화면으로 늦가을 드라이브를 떠났다. 차가운 바람 맞아 자꾸만 허무해져 가는 가슴 한 켠을 따스한 기억으로 가득 채워주는 산골마을 여행.
경북 김천시 구성면과 영동군 상촌면이 경계 짓는 고개 우두령에서 영동 방면으로 내려와 처음 맞는 마을 흥덕리. 하늘 위의 동네다.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 위로 가느다란 황톳길이 구불구불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 구름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은 곳. 마을 마당에는 여느 시골 마냥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아름드리 그늘을 드리웠다.
행여 질세라 그 옆에 곧게 뻗어 우뚝 솟은 전나무가 이채롭다. 300년 넘었다는 40m 높이의 이 나무는 영동군 내에서 가장 높다는, 그래서 주민의 자랑이 된 나무다.
아들 없는 이들이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점지해 준다는 신령함까지 덤으로 갖췄다. 마을 안팎으로 감나무 천지다. 나무에 걸린 감도, 곱게 깎인 채 줄에 매달린 감도 무너진 흙벽집 사이로 불어 오는 서늘한 바람을 쐬고 있다.
흥덕리에서 좀 더 내려오면 바로 몇 해전 예상치 못한 흥행을 일으켰던 영화 ‘집으로’의 촬영 무대가 됐던 궁촌리다. 심술이 잔뜩 난 서울 손자의 비위를 맞춰주던 할머니의 체취가 금세라도 살아 와 바람에 일렁인다.
유곡리를 지나 상촌에서 49번 지방 도로를 갈아타면 산 굽이를 돌아 용화면에 이른다. 중간에 큰 산자락을 넘는데 그 이름이 민주지산(해발 1,214,m)이다.
충북 전북 경북을 가르는 산줄기로 소백산 줄기가 추풍령에서 내려 섰다가 다시 꿈틀 일어서는 형국을 하고 있다. 충청 경상 전라의 삼도가 만나는 곳이다. 민주지산 정상과 각호산, 석기봉, 삼도봉 등에서 흘러 내린 물이 한데 모이는 물한계곡은 국내 최대 원시림의 계곡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 산자락을 넘는 고개가 도마령(840m). 고갯마루에 새로 정자 상용정이 조성됐다. 이 곳에서 보는 풍경도 호쾌하다. 만만치 않은 높이(840m)를 오르느라 길은 굽이굽이 물결 친다. 만곡을 이룬 선의 흐름과 장단이 속리산 가는 길의 말티재, 흑산도의 12굽이 용고개길 못지않다.
첩첩산중인 영동은 그 첩첩마다 아름다운 경치들을 꼭꼭 숨겨두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황간IC에서 2km 가량 떨어진 월유봉도 비경 중 하나. 금강으로 흘러 드는 맑은 물줄기 가에 깎아 세운 듯 세모난 봉우리가 우뚝 서 있다. 그 절경에 달님도 쉬어간다는 월유봉은 이국적 풍경 덕에 TV 드라마 ‘해신’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우암 송시열이 이 곳에 한천정사를 짓고 강학을 했었다고 한다.
민주지산과 함께 영동의 명산으로 꼽히는 게 천태산이다. 충북의 설악이라 불리는 암벽미가 일품. 천태산 자락의 천년 고찰 영국사에는 수령 1,000년이 넘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가 서 있다.
높이가 31.4m, 둘레가 11.5m이고 가지는 사방으로 퍼져 그 반경이 20m를 넘는다. 곧 11월 중순이면 샛노랗게 물든 은행잎 덕에 천지가 장관이다.
영동=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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