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초(初)가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애어른’이라는 말을 듣던 나는 어릴 적부터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이라는 노래 가사에, 시월 말일은 무언가 대단히 쓸쓸하고 그런 날인가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근자 들어 시월의 마지막 날이면 서울 바닥이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대학가나 강남 일대를 중심으로 ‘할로윈’이라고 하는, 남의 나라 축제를 기리기 시작한 것. 할로윈 데이의 원뜻은 ‘모든 성인의 날 전야(all hallows' eve)’로, 카톨릭에서 11월 1일마다 지키는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 하루 전을 말한다.
고대의 켈트 족은 새해가 밝기 전에 귀신들이 하루 모여 집에 들렀다 간다고 믿었다는데, 그런 풍습들이 흘러 흘러 오늘의 ‘할로윈 데이’로 정리된 듯하다.
이날 서양에서는, 아이들이 코스튬을 입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탕을 얻어간단다. 이런 모습들이 서울에서도 재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걱정되는 일인데, ‘발렌타인 데이’나 ‘빼빼로 데이’와 같이 밑도 끝도 없이 나타나는 ‘데이(day)'들이 상업적으로 변질되어 주머니 용돈만 유혹하는 듯해서다.
♡ 할로윈 호박 수프
다른 나라의 문화를 소개해주며 아이들에게 작은 재미를 주기 위함이라면 할로윈 데이의 상징인 호박을 이용해서 간식을 만들어 보자. 호박 중에서도 전분과 무기질, 비타민의 함량이 가장 많은 단 호박을 이용해서 크림 수프를 만들면 건강식이다.
‘머핀’이라고 불리는 카스텔라 반죽이나 편의점에서도 살 수 있는 즉석 컵케이크를 이용, 호박 미니 케이크를 만들 수도 있다. 얇게 썰어서 버터에 볶은 호박을 반죽에 섞어주면 되는데, 호박에 황설탕이나 꿀과 계피로 맛을 더할 수도 있다. 이 밖에도 호박 푸딩, 호박 아이스크림, 호박 파이 등 호박으로 만들 수 있는 메뉴는 아주 다양하다.
값비싼 외제 코스튬을 사 입히고, 멋진 레스토랑의 ‘할로윈 특선 메뉴’를 사줘야만 부모 노릇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남의 나라 명절에 사치스런 옷과 음식을 누리는 아이들이 과연 어떤 어른으로 자라날 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시월의 마지막 밤 파티에 흥분하는 이들은 비단 어린 아이들 뿐이 아니다. 기괴한 화장을 하고 클럽이며 바로 모여드는 젊은이들도 많아지고 있으니까. 한 쪽에서는 광장에 모여 촛불 시위를, 또 한 쪽에서는 뜻도 모를 축제에 들뜨는 우리 모습이 ‘타인의 취향’이나, “너나 잘 하세요”하는 오늘의 분위기와 들어맞는다.
♡ 절기 음식
개인적으로 할로윈 데이를 축하하지 않는 이유는 한국에도 다양한 축제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선인들은 네 계절로 나뉜 일 년을 다시 쪼개어 스물 네 개의 절기로 나누고 농경의 흐름을 맞추었다. 가을 한 계절만 보아도 입추(가을의 시작), 처서(일교차 커짐), 백로(이슬이 내림), 추분(밤이 길어짐), 한로(찬이슬이 내림), 상강(서리가 내림) 등으로 나누어 그에 맞는 절기 음식을 준비해 먹었던 것.
예를 들어 추분에는 버섯을, 한로에는 국화를 이용하여 먹고 마셨었는데, 버섯을 이용한 적을 부치든가 국화주, 국화 전 등으로 절기를 즐겼던 것이다. 겨울은 입동(겨울 시작), 소설(얼음이 얼기 시작), 대설(큰 눈이 옴), 동지(밤이 가장 긴 날), 소한(가장 추운 날), 대한(큰 추위)로 나누어 지냈고 절기 음식으로는 아직 기억되고 있는 동지 팥죽이 유명하다.
황진이 같은 옛 문인들은 봄이 오면 들에 나가 자리를 널고 막 따낸 꽃으로 지진 화전에 소리 한 자락으로 멋을 누렸었다. 절기에 따라 사는 그들의 생활과 각 절기마다의 작은 축제 같은 풍습들이 영화도,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에는 대단한 엔터테인먼트였을 터다.
겨울의 여섯 절기를 살펴보니 동지의 밤이 얼마나 긴 줄 새삼 알겠고, 긴 밤의 한 허리를 확 베어내 이불 속에 넣었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밤에나 꺼내어 쓰고 싶다 했던 황진이의 마음이 더욱 절절하다. 이 밖에도 가을 절기 음식으로는 유자로 만든 유자 화채나 꼬챙이에 꿰어지진 두부에 닭을 우린 육수를 부어 내는 탕이 있고, 팥이랑 무를 켜켜로 쌓아 만든 시루떡이나 추어탕이 있었다.
절기 음식은 각 절기마다 가장 흔한 재료, 즉 제철 재료로 만든 음식이므로 잘 알고 응용하면 ‘웰빙’이 화두인 21세기에도 어울릴 만한 식이 요법이 될 수 있겠다.
아무리 사상의 자유가 있어 각자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제 사는 나라의 돌아가는 절기도 모르면서 귀신 옷 뒤집어쓰고 길거리에 다니는 것은 코미디다. 프랑스에서는 싸구려 햇와인에 불과한 ‘보졸레 누보’를 매 11월이면 호텔에 모여 마시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서울의 풍경도 마찬가지.
내가 좀 구식인지 몰라도, 나는 봄이면 앵두 화채를 먹고 가을이면 산에서 딴 자주 빛 산수유를 머리에 꽃아 악귀를 쫓았다는 우리의 절기가 더 예쁘고 멋지다.
푸드 채널 ‘레드 쿡 다이어리’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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