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늦가을 도쿄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가본 적이 있다. 중심가 신주쿠 근처에 있는 신사 건물은 쓸쓸한 바람 탓인지 더 음울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입장은 자유스러웠지만, 그곳이 특별한 곳임을 강조하듯이 사람들 표정이 엄숙하고 몸짓이 조심스러웠다.
이채로운 것은 전사자들 혼령을 모신 건물 옆의 말(馬) 조각상과, 금방이라도 ‘쾅’ 발사될 듯한 실제 대포였다. 비감을 자아내듯이 고요히 서 있는 청동색 말 조각 앞에 안내문이 있었다.
전장에서 용맹한 군인들과 함께 희생된 말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각을 세웠다는 것이다. 전쟁박물관을 연상 시키기도 하는 곳이었다. 야스쿠니가 국제적 관심을 모으기 전이었지만, 돌아오는 마음은 어둡고 걸음은 무거웠다.
●거듭된 참배에 우리언론 피로감
총리로서는 고이즈미가 처음 참배한 이후 야스쿠니는 위험한 정치적 신사로 떠올랐다. 최근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가 위헌이라는 오사카 고등법원의 판결이 나온 직후에도 참배했다.
법원은 총리의 참배는 공적 행위이며 정교분리를 규정한 헌법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사적 참배라는 이유를 내세워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각료회의 역시 총리의 참배가 합헌이라는 입장을 공식화했다.
고이즈미 참배는 일본 우경화ㆍ군국주의화의 상징이다. 그는 ‘총리 참배’를 기정사실화 하려는 듯 노골적으로 행동하고 있으나, 우리 언론들은 종전과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반복 참배에 일일이 대응하는 데 피로감이 쌓인 것인지, 일본의 우경화에 눈 감기로 생각을 바꾼 것인지 알 수 없다.
외국 신문의 비판은 강경하다. 파이낸셜 타임스 사설은 그의 참배는 상호의존성이 높은 아시아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며, 민족주의의 재부상은 한중일 3국 모두에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뉴욕 타임스 사설도 참배는 우익 민족주의자의 지지를 받을 테지만, 동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본이 20세기의 역사를 일신하고 명예로운 21세기로 진입할 때라는 것이다. 헨리 하이드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장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참배의 부당성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도쿄 전범재판이 일본의 주장대로 ‘승자의 정의(正義)’가 아니었는데도, 전범들이 합사됨으로써 야스쿠니가 군국주의의 상징이 됐다는 것이다.
나는 야스쿠니의 깊은 비의(秘意)를 잘 알지는 못했다.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A급 전범 14명이 비밀리에 합사되었다는 정도 뿐. 지난 4월 다카하시 데쓰야 도쿄대 교수가 ‘야스쿠니 문제’라는 저서를 펴냈다. 이 책은 단시일 내에 30만부 이상 팔렸고, 한국에서도 번역됐다.
이 책은 동양의 화약고 같은 야스쿠니의 위험성과 국가주의에 악용되는 비논리성을 명료하게 보여 준다. 책에 따르면 메이지유신 때부터 2차 대전까지 전사한 246만여 명이 합사돼 있고, 엉뚱하게도 2만여 명의 조선인도 포함돼 있다.
일본 젊은이들은 ‘전사하면 반드시 야스쿠니에 혼령을 모셔준다’고 믿으며 전장으로 나간다. 그들이 죽어 야스쿠니에 합사되면 유족은 슬픔을 누르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천황에게 감사한다.
저자는 ‘일본인은 이미 국가교의 신자다. 그 때문에 국가교의 순교자를 사후에 전부 신으로 모시는 야스쿠니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곳은 전사자를 추모하는 곳이 아니라 드높여 떠받듦으로써, 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타오르게 만드는 곳이다.
●힘센 철부지를 이웃두면 불안
일본에서도 ‘장병이 전사하면 신이 된다며 생명을 버리게 하는 종교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를 ‘천박한 주장’이라고 반박하는 우익의 목소리가 날로 거세지고 있다.
야스쿠니 문제의 정점에는 천황제도가 자리잡고 있으니 ‘일본인의 정치적 연령은 12세’라는 맥아더의 관찰이 아직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들의 불장난은 언제나 우리에게 옮겨 붙었다. 때문에 힘 센 철부지가 한사코 불안한 것이다.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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