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야 장사꾼이니까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인데, 사람들이 그걸 사회공헌이라고 생각한다면 뜻밖의 소득인데요?”
휴일 하루에만 2만 여명이 드나드는 인사동의 대표적 문화공간 ‘쌈지길’, 그리고 경기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를 아이들과 함께 가볼 만한 공간으로 바꿔놓고 있는 어린이 테마파크 ‘딸기가 좋아’. 쌈지길은 지하 2층, 지상 4층의 나선형 건물로 70여개의 전통 공예품점, 갤러리, 음식점 등이 모여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지난해 12월 개관했다.
파주 헤이리 마을에 있는 ‘딸기가 좋아’는 우주선 모양을 한 독특한 디자인의 놀이공간으로, 쌈지의 영 브랜드 ‘딸기’의 캐릭터 상품도 판매하고 있다. 옆에는 쌈지가 소장한 현대 미술 컬렉션을 보관ㆍ전시하고 있는 갤러리 ‘내 마음속의 앨리스’가 있다.
전통과 현대, 놀이와 배움이 공존하는 도심 속 문화공간을 창조해 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천호균(56) 쌈지 대표. 하지만 그는 “쌈지의 문화사업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말에 오히려 “그런가요?”라며 놀라워했다.
그는 “연인들의 데이트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쌈지길을 만들거나 아이들의 놀이터를 만들어 주기 위해 ‘딸기가 좋아’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며 “우리 브랜드를 알리고 제품 좀 팔아보려고 아이디어를 낸 것일 뿐인데,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천 대표는 또 “요즘 ‘딸기가 좋아’는 입장료를 3,000원이나 받고 있는데, 사람 참 미안하게 만든다”며 쑥스러워했다.
천 대표가 ‘아트’라고 부르는 쌈지의 문화 마케팅은 전적으로 쌈지의 브랜드 전략이다. 따라서 ‘문화’보다는 ‘마케팅’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
그는 “처음 회사를 설립할 때 ‘아트’와의 동맹이 절실했다”며 “이름도 없는 국내 중소기업이 만든 핸드백을 소비자들이 사게끔 하려면 다른 브랜드와 차별되는 그 무엇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술과 거리가 멀었던 천 대표는 제 발로 언더그라운드 예술인들을 찾아 다니며 교분을 쌓았다.
92년 문을 연 압구정동 매장에서 판화 작품과 CD를 함께 팔았고, 대형 호텔을 빌려 ‘아트쇼’를 개최했다. 또 서울 암사동 사옥을 예술인들에게 모두 내주고 ‘쌈지 스페이스’라는 작업실로 꾸몄다. 이 작업실은 현재 홍익대앞 지상 6층, 지하 1층 건물로 이전했는데, 1년에 10명씩 이 곳을 거쳐간 예술인이 이제 100명에 달한다.
이들은 한 달에 한번씩 쌈지 디자이너들과 만나 자신의 예술적 감각을 전수하는 것으로 보답하고 있다. 천 대표는 또 99년부터는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을 개최, 언더그라운드 음악인들을 발굴하고 인디 밴드의 음반 발매를 지원하고 있다.
심술 궂고, 욕심 많고, 절대 예쁘지 않고, 매일 어른들에게 혼만 나지만 창의적이고 개성이 뚜렷한 브랜드 캐릭터 ‘딸기’는 그야말로 천 대표의 축소판이다. 경기고 재학 시절 공부보다는 주먹으로 이름을 날리고, 대학(성균관대 영문과) 시절에는 카페와 기원을 차려 학점이나 취업보다는 돈벌이에 재미를 붙였다.
78년 그의 말대로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보란 듯이 대기업(대우중공업)에 취직했지만, 4년 동안 단 한번도 자신의 기획서가 채택되지 않았을 정도로 무능한 사원이었다.
81년 무작정 회사를 그만둔 뒤 친구가 실패한 가죽 수입업체를 인수해 재미를 봤다. 하지만 대기업들이 줄줄이 가죽 수입업에 뛰어드는 통에 다시 위기를 맞았고, 창고에는 재고로 남은 가죽이 쌓여만 갔다.
가죽으로 할 일이 없을까 고민하던 천 대표는 ‘남아 도는’ 가죽으로 이왕이면 큰 핸드백을 만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당시 ‘거지백’으로 불렸던 이 핸드백은 천 대표 자신도 얼마나 팔았는지 잘 모를 정도로 대히트를 쳤고, 천 대표는 이 같은 성공을 바탕으로 92년 토털 잡화 브랜드 쌈지를 탄생시켰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천 대표는 노랗게 물들인 단발머리에 “집에 있길래 주워 입었다는” 허름한 가죽 조끼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다닌다. 아들 결혼식 주례를 자신이 직접 보고, “격이 떨어진다”며 한 유명 골프장으로부터 회원 가입을 거부당한 괴짜 중의 괴짜다.
쌈지의 지난해 매출은 1,500억원. “명품에 밀려 3년째 매출이 제자리 걸음”이라는 설명도 천 대표답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쌈지의 미래는 밝다. “소비도 예술과 같아서 명작을 많이 보고 난 후에야 좋은 작품을 고르는 눈이 길러지는 것처럼, 한국 여성들도 명품을 한번씩 써 본 후에야 비로소 진짜 좋은 제품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신재연기자 poet33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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