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지도부의 총사퇴는 사실상 여당이 노무현 대통령과 거리를 두는 ‘마이 웨이’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이 “모두가 내 책임”이라며 지도부 유지 의사를 피력했지만 불과 하루 만인 28일 당 지도부는 떠밀리다시피 사퇴했다.
의원ㆍ중앙위원 연석회의는 더 이상 노 대통령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분위기 같았다. 깊고 넓은 파문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당청 갈등 수준을 넘어 노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과 권력누수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그 동안 노 대통령 말 한마디에 당이 좌우됐던 상황을 감안하면, 지도부 사퇴를 강압한 연석회의의 기류는 일종의 ‘항명’이다. 냉정하게 보면, 말을 따르지 않는 ‘항명’ 수준을 넘어 아예 노 대통령과 차별화하겠다는 선긋기로도 볼 수 있다. 연석회의에서 노 대통령을 향한 비난이 봇물 터지듯 쏟아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상황은 당청 관계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우선 노 대통령의 영향력은 현저하게 감소하고 당에서는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간단없이 터져 나올 것으로 보인다. 재선인 김영춘 의원은 “이제부터는 당이 대통령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고 주체적인 판단에 따라 움직일 것”이라며 “청와대의 뜻이 옳을 때는 당이 수용하겠지만, 배치될 때는 분명히 선을 긋는 상황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내년 초 조기전당대회가 열리면, 우리당은 ‘노무현 당’에서 ‘대선주자들의 당’으로 변모할 전망이다. 정동영 통일부장관과 김근태 복지부장관 등 대선주자들이 당에 복귀하는 순간, 당내 세력들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재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계파별 세력대결도 격화할 것이며 전당대회에서 누가 당권을 잡더라도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노 대통령은 조기 레임덕에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 노 대통령이 권력누수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겠지만, 당에 대한 마땅한 지렛대가 없다는 점이 한계다. 국민 지지도가 바닥을 기고 있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당을 제어할 명분이나 수단이 없는 것이다. 재야파 중진인 장영달 의원이 “앞으로 당이 청와대의 신세나 도움을 받을 일이 별로 없을 것”고 말한 것도 이런 예측을 가능케 한다.
다만 당이 스스로 자제할 수는 있다. 대통령 임기가 2년 이상 남았는데 조기차별화로 여권 전체를 내홍에 빠뜨리는 게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 당청 관계가 그나마 모양새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대연정처럼 당내 지지를 얻지 못하는 정치게임을 계속한다면 우아한 당청 관계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특히 내년 5월의 지방선거가 노 대통령을 더욱 어렵게 할 가능성이 있다. 선거 승리를 위해 당은 노 대통령보다는 정동영, 김근태 두 대선주자를 브랜드로 내걸 것이기 때문이다. 두 대선주자들도 지방선거에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격돌을 벌일 것으로 보여 이래저래 우리당은 예측할 수 없는 격랑에 휘말릴 전망이다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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