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내 꿈의 방향을 묻는다’(2003년. 이하 ‘내 꿈의 방향’)의 저자 정지원(35)은, 책 날개에 실린 약력에 따르면, 1993년에 정식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그보다 두 해 전인 1991년 ‘오월 문학상’ 시 부문에 당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시인은 한국의 정치적 문화적 민주주의가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켤 무렵 성년에 다다랐고, 문학계의 한 모퉁이에 이름을 들이미는 것으로 성년식을 치른 셈이다. 이 세대의 문인들에게 역사나 공동체 같은 말은 별다른 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 말들이 내뿜었던 빛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었던 칠흑의 어둠은 어느덧 걷힌 듯 보였고, 그 세대의 가장 ‘세련된’ 정신들은 ‘새로운 서정’을, 개인성을, 욕망을 외쳤다.
그 윗세대의 문학적 사제들도, 프랑스인들이 생산하고 미국인들이 보급한 각종 포스트(脫)주의의 물줄기를 이리저리 끌어와, 이 새로운 서정에 성세성사(聖洗聖事)를 베풀었다.
이런 포스트주의와 무관했던 한 일본계 미국인은, 그 즈음, 자유민주주의가 인류의 이데올로기 진화의 종점이자 인류 최후의 정부 형태가 될지 모른다며 ‘역사의 종말’을 선언해, 30대의 나이에 프랜시스 후쿠야마라는 제 이름을 이 행성의 가장 유명한 논객 리스트에 올리기도 했다.
한국에서 유사 파쇼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과 때를 맞추어 동유럽에서는 공산주의 정권들이 민주주의 혁명의 이름으로 하나 둘 퇴장했고, 그래서 ‘역사의 종말’이라는 선정적 선언이 그럴싸하게 들리기도 했다.
문학은 이제 역사라는 짐을 내려놓아도 될 것 같았다. 실제로, 그 즈음에 글쓰기를 시작한 많은 문인들이 역사와의 결별과 공동체로부터의 퇴각을 실천했다.
그런 세대적-시대적 원근법을 마음에 새기며 정지원의 ‘내 꿈의 방향’을 읽다 보면, 이내 기묘한 낯섦과 맞닥뜨리게 된다. 한 젊은 시인이 “내가 꿈꾸는 세상은/ 꺾이고 갇힌 희망이 터져 나오는 땅// 흙의 평등/ 바람의 자유/ 물의 평화”(‘내가 꿈꾸는 세상’)라고 노래할 때, 더 나아가 “중심을 잃어 어지러운 날/ 내 피를 보태어 사위어가는/ 잊혀진 나무와 바람과 새와/ 희망을 빼앗긴 사람들의 동맥을/ 다시 뛰게 할 수 있다면”(‘내 꿈의 방향을 묻는다’)이라고 노래할 때, 그것이 그 자체로 낯선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것은 자연스럽다.
젊음의 가장 큰 특권은 이상에 충실할 수 있는 정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젊음이 ‘몰락’의 1990년대 한복판에 내던져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서로를 일으켜세우는 힘찬 생명력을 (자신의 시에) 담아내고 싶다”(‘자서’)고 털어놓는 목소리의 생동감은 어쩔 수 없이 낯설다.
물론 이런 낯섦의 느낌은 독자의 세대적-시대적 원근법이 거친 데서 빚어진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 시인이 시를 쓰기 시작한 1990년대 들머리는 학생 운동이 가장자리로 밀려나면서 오히려 억셈과 세참을 획득한 시기였다. 시인 자신이 시집 후기에서 자신은 학생 운동을 하며 시를 만났다고 털어 놓고 있기도 하다.
시인의 문학 이력 맨 앞에 기입된 ‘오월문학상’이나 민족해방문학 계열의 무크 ‘노둣돌’도 그의 ‘꿈의 방향’과 사뭇 어울린다. 말하자면 정지원은 그 세대의 가장 ‘세련된’ 정신에는 속하지 않았던 것이고, 그래서 제 꿈의 방향을 역사와 공동체의 지평 위에 설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집에 묶인 작품들이 그의 20대만이 아니라 30대 전반기까지의 자취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이 시집이 드러내는 태도와 정서가 공간 전체를 통해 큰 틀에서 동질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정지원을 읽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
그는 학생 운동에 발을 담그던 시작(詩作) 초기의 마음자리를, 단단해 보였던 수많은 가치들에 쩍쩍 금이 가던 90년대를 통과해 30대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낯섦은 반가운 낯섦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복음’이 매스컴과 이데올로기 시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무렵, 그 자신 포스트주의의 발호에 일말의 책임이 없지 않은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가시 돋친 말로 후쿠야마를 비판한 바 있다.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년)이라는 책에서 그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행복감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의 이상형이 도래했다고 노래하기 전에,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해방적 거대 담론들의 종언을 축하하기 전에,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수의 인류가 노예상태에서 굶주리며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자”고 일갈했다.
이 프랑스 철학자가 보기에, 그 즈음 인류 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자본주의 신세계질서는 대규모의 실업과 인종 갈등, 참여민주주의의 약화와 나라들 사이의 경제 전쟁, 군수 산업의 무한 확대 등 인류의 존속 자체를 위협할 재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이후 흐른 십여 년의 세월은 데리다의 경고를 현실화했다.
정지원의 ‘내 꿈의 방향’은 이 자본주의 신세계 질서의 비참함에 대한 문학적 대응이다. 이 시집의 화자들이 “동생과 나 눈뜨고 나면/ 빈 베개만 반달로 패여 단칸방 비추었네”(‘벙어리장갑1’)라거나 “엄마에게 첫 편지를 쓰던 밤/ 내 언 발가락을 따스한 발로 비벼주며/ 이불 속에서 수선화처럼 언니가 웃었네”(‘벙어리장갑2’)라며 어린 시절의 가난을 되돌아볼 때, “모멸의 언덕을 홀로 십자가 끌고 오르는 서러운 그를 생각합니다// ‘내가 아플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내가 죽어갈 때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지치고 슬픈 눈동자를 마주합니다// (...) 인간이 저지르는 살육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을 봅니다”(‘이 다음엔 또 어디일까’)라며 가장 낮은 곳에 임하셨던 사랑의 메시아에게 기대어 지상의 평화를 간구할 때, “얼마나 외로움에 지지 않아야/ 끝이 보일까/(...)// 걸음마다 물집 터져 엉기도록/ 떠난 사람들을 부르다/ 얼마나 질기게 속울음 쟁여야/ 들풀마저 숨 거둔 나라/ 목이 쉰 시절도 물결이 되어/ 채 피지 못하고 스러져/ 잊혀지며 젖고 있던 이들까지/ 몫몫이 별빛으로 찾아올 수 있을까”(‘길 위의 사람들’)라며 싸움의 고단함을 털어놓을 때, 또 “능멸 뒤의 분노까지 의도되었던 것은 아닐까/ 밤마다 심장을 물어뜯는 노여움들을/ 어금니 깊숙이 밀어넣으면/ 헛되었던 기대들이 가시가 되어/ 모든 핏줄을 뚫고 나온다// 머리가 새하얘지도록 활활 기억하겠다/ 고맙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혹한지 보여주어서”(‘발포명령’)라며 학살자에 대한 분노를 터뜨릴 때, 이것은 지나간 일인 것만이 아니라 지금과 앞으로의 일이고, 꽃만이 아니라 사람도 “무리지어 살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들꽃을 보냅니다’)는 믿음의 표현이다.
지난 주의 김남주에 이어 정지원을 읽는 독자의 마음은 이 젊은 시인의 재간에 대한 탄복으로 밝아지기에 앞서 죽은 시인의 문학적 불운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어둡다.
분노할 때는 사자와 같고 사랑할 때는 성자와 같다는 점에서 정지원은 김남주를 닮았지만, 정지원의 직정과 직설은 거의 언제나 부드러움으로 휘감겨 있다. 정지원이 민중을, 저항을 노래할 때, 그 민중과 저항은 서정의 물결로 출렁인다. 그 서정이 ‘새로운 서정’이 아닌 점이 외려 더 든든하다.
마음이 베일까 두려워 김남주를 읽지 못하는 독자도 정지원은 한결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두 시인의 타고난 기질의 차이이기도 하겠지만, 더 깊게는 처지의 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감옥 속의 시인과 감옥 밖의 시인의 차이이기도 하고, 군사파시즘 체제 속 시인과 유사민주주의 체제 속 시인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군데 군데 박힌 연애시들도 ‘내 꿈의 방향’의 서정성을 도두보이게 만든다. 정지원의 연애시들은, 드물지 않게, 사적 울림과 공적 울림을 함께 지니고 있다.
예컨대 ‘나는 언제나’의 화자가 “내 사랑을/ 그대가 알아보지 않는다 해도/ 나는 언제나/ 그대를 위해 꽃을 보내리//(...)// 아무도 내 얘기 귀 기울이지 않아도/ 새 잎이 움트고/ 산동네에 별이 뜨는 한/ 나는 언제나/ 그대의 맑은 꿈이 되어 함께 살겠네”라고 노래할 때, 그 ‘그대’는 일차적으로 화자의 연인이겠지만, 한편으로 어떤 공적 가치(의 담지자)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이 시의 넷째 연 “세월을 아프게 건너간/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희망이나 사랑은/ 저문 강을 건너는 소리 같은 것”(‘나는 언제나’)에서, 낮고 어두운 자리에서의 (사회적) 실천을 다짐하는 화자를 엿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독법이 무슨 소용이랴. 그저, 저항의 시인 정지원이 뛰어난 연애 시인이기도 하다는 점만 적어 두기로 하자.
▲ 불 꺼진 집
늦은 밤 내 발소리가 깨우지 않았다면
어둠만이 밤새 거인처럼
웅크리고 있겠다
돌아와 불이란 불은 죄 켜고 숨돌릴 때까지
벗어놓고 급히 나간 허물 같은 옷가지랑
던져진 신문은 무슨 말을 했을까
밥통에 말라붙은 밥알처럼 딱딱하고 씹기 힘든
하루도 겨우 넘겼구나
소라게처럼 나도 집 한 채 지고 살아간다
그러다 네가 오면 나를 위해 환히 불을 켜는
집 불안한 내 영혼의 집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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