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세고 용감한 것이 자랑인 세상이지만, 동화작가 박기범(32)은 자신이 겁 많은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그런 그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선을 넘어 이라크로 들어갔다. 전쟁이 발발하던 2003년 2월부터 그 해 8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바그다드를 왕래했다. 그는 왜 그곳으로 갔을까. 그리고 무엇을 보았을까.
‘어린이와 평화’는 누가 떠밀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기 뜻에 따라 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의 일원으로 찾아간 ‘사지(死地)’ 바그다드의 현장 일기이다.
그런데 일기는 처참한 살육과 인간성의 상실을 목소리 높여 고발하기 보다는, 그곳 아이들의 천진한 얼굴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렇게 전쟁을 하고 싶다면, 그 난리통에 어른 보다 먼저 희생되는,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요르단을 경유해 처음 이라크에 들어갔을 때 작가는 무척 의아스러웠다. 너무나 평화로운 사람들. 전쟁을 코 앞에 둔 나라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처음 보는데도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집을 공개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아이들은 서로 찍어달라고 몰려들었다. 낯선 이방인 아저씨에게 달려들어 함께 공을 차고 땀을 흘렸다. 또랑또랑한 눈망울, 그리고 환한 웃음. 작가는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주문을 외듯 기원하지만 그 전쟁은 보란 듯이 일어났다.
잠시 피했다가 다시 들어간 이라크.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미사일이 날고 이라크 군인이 응사하는 대공포 소리가 기관총 소리처럼 들렸다. 작가는 방공호로 숨어 들었다. 그 틈에 다시 만난 구두닦이 소년 하싼. 많이 변해 있었다. 신발이 찢어지고 엄지 발가락이 나와 있었으며 훨씬 말라 보였다.
그러고 보면 하싼 뿐이 아니었다. 하싼의 친구 세이프는 전쟁 통에 집에서 쫓기듯 버림을 받았다. 부모도, 집도 없이 떠돌게 된 처지였다. 길에서 자고 구걸을 해서 겨우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살람의 친구는 폭탄의 파편을 맞아 한 팔을 못쓰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위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놀아주고 밥 사주고…그나마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고, 무엇보다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돼 있었다.
잠깐 머무는 이방인으로서는 한계가 너무 뚜렷했고 친구가 되고 싶어도 삶의 바탕을 함께 하지 못하는 한 이방인일 수 밖에 없었다. 바그다드에서 나오던 마지막 날, “나도 코리아에 가요? 나도 데리고 가요? 아이 원트 고우 투 코리아”라고 하던 쎄이프의 목소리는 한국에 와서도 잊혀지지 않았다.
작가는 미국뿐 아니라 이라크도 원망한다. 미군의 침공이 임박하자, 이라크는 국제반전운동단체 회원들을 주요 시설의 방패막이로 배치, 그들의 목숨을 이용해 전쟁을 이끌어가려 한 것이다.
더 큰 분노는 대한민국을 향했다. “이 나라 정권은 침략군을 보내는 것으로 그 동안 내가 아이들과 함께 가꾸고 배워온 평화와 자유, 생명과 민주주의 같은 가치들을 몽땅 짓밟고 뭉개버렸습니다…이 끔찍하고 엄청난 짓들을 부시, 블레어와 함께 벌이고 있는 자가 바로 내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그는 지난 해 9월 노무현 대통령을 민간단체인 터키국제전범재판에 기소했다.
부모, 형제, 동료와 주고 받은 편지는 작가의 고민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형은 이렇게 썼다. “너의 존재 의미는 이곳에서 더 크다. 가족의 한과 고통, 그리고 네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추억까지 합해서 너와 연결된 모든 관계는 단시간에 끝나지 않을 절망 뿐이다… 기범아, 냉정하게 판단해다오.”
부모, 형제의 절박한 만류에도 그가 이라크에 들어간 것은, 그곳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만큼이나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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