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재산을 상속 받은 A씨는 국세청으로부터 13억3,687만원의 상속세 고지서를 받았다. A씨는 이를 현금으로 내는 대신 상속ㆍ증여세 물납제도를 활용해 특수 관계에 있는 B공업의 비상장 주식 5,030주로 대납했다. 이 주식은 법절차에 따라 자산관리공사에 넘어가 매각물건으로 나왔으나 언제 상장될지 도무지 전망이 없는 이 주식을 사겠다고 나서는 임자가 없었다.
자산관리공사는 2년 가까이 지난 올해 8월 말 어쩔 수 없이 이를 B공업(A씨가 사실상 매입자)에게 되팔았다. 매각 금액은 물납 금액(상속세 부과액)의 61%에 불과한 8억1,024만원에 그쳤다. 결국 정부 입장에서는 당초 과세액 중 5억2,663만원을 덜 받은 게 됐고, A씨는 그만큼 상속세를 합법적으로 절약한 셈이 됐다.
상속ㆍ증여세를 주식으로 대신 낼 수 있도록 한 물납제도가 합법적 탈세의 온상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17일 재정경제부 등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정부가 상속ㆍ증여세로 받은 비상장주식의 매각 실적은 매각 예정가 1,756억원의 59%에 불과한 1,030억원에 그쳤다. 726억원의 세금이 허공으로 날아간 셈이다.
이는 시장에서 제값 받고 팔기가 불가능한 비상장주식을 상속세 대신 내고, 이를 저렴한 가격으로 되사는 비정상적 ‘세테크’가 암암리에 성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비상장주식을 정부가 헐값으로 팔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 주식이 시장에서 아무런 매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장 여부가 불투명할 뿐 아니라 이를 갖고 있어도 회사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어서 일반인이 사려고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고, 따라서 특수관계자에게 싼값으로 다시 넘어가는 것이다.
실제로 이 제도가 시행되기 시작한 1997년 이래 상속세 대신 정부가 받은 비상장주식은 대부분(91%)이 ‘특수관계자’에게 넘어갔다. 유형별로는 총 95건 중 56건을 기존 주주의 친ㆍ인척 등이, 30건을 이를 발행한 회사가 매입했다.
열린우리당 이근식 의원은 최근 비상장주식 물납 실적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정부가 아직 보유하고 있는 비상장주식의 평균 보유일수는 927일로 2년이 훨씬 넘는다”면서 “일반인들은 고지된 세금을 기한 내에 내지 않으면 높은 지연이자를 물지만 물납제도를 통하면 비상장 주식을 관계자가 헐값에 다시 사는 방식으로 오히려 세금을 절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수관계자는 물납 비상장주식을 살 수 없도록 해 탈세를 원천적으로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경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물납의 제도적 허점에 대해서는 정부도 인식하고 있다”면서도 “다른 방법으로는 상속세를 낼 수 없는 이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제도라 손대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그러나 “정부는 부동산이나 상장주식 등 상속세를 낼 수 있는 다른 수단이 있는지 엄격히 심사하지 않은 채, 대부분의 물납신청을 받아주는 추세”라며 “세수가 부족하다고 기업과 국민들을 쥐어짜기 전에 이 같은 제도부터 뜯어고치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김신영 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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