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닭에 옮길라" 엽총으로 종일 철새쫓아
‘탕, 타~앙’
14일 오전 충남 홍성군 구항면 오봉리. 2발의 총성이 울렸다. 비상하던 철새떼가 황급히 방향을 바꾸더니 인근 저수지 쪽으로 날아갔다. 이곳은 국내 대표적 철새 도래지인 천수만과 인접한 마을이다. 4만2,000마리의 닭을기르는 박태원(56)씨가 자신의 양계농장으로 접근하는 철새를 쫓기 위해 엽총으로 공포를 쏜것이다.
“철새가 날아와 자식 같은 닭에게 조류독감을 전염시키면 모든 게 끝장이잖아유. 매일 3∼4차례 축사를 소독하고 외부인의 농장 출입을 막고 있지만 철새, 까치, 산비둘기 등이 축사와 바로 옆논까지 날아와 걱정”이라고 그는 말했다. 박씨는 홍성군에서 유일하게 유해 조수퇴치 목적으로 엽총 사용허가를 받았다. 매일 아침 집에서 2.5㎞ 떨어진 파출소로 달려가 영치시킨 엽총을 꺼내 철새를 쫓고 오후엔 다시 파출소에 맡긴다.
서해안 지역의 농민들은 지금 온통 조류독감 공포에 휩싸여 있다. 비슷한 시각, 금강 철새도래지에서 가까운 전북 군산시 임피면 보성리의 가자농장. 10년 넘게 양계농장을 해온 주인 김상근(51)씨는 소독 작업에 분주했지만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8만 마리를 키우는 김씨는 조류독감 때문에 1년 전 끊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고 했다. “올 겨울 날 일이 걱정”이라는 그는 “경각심도 좋지만 대책도 없이 언론에서 떠들면 떠들수록 축산농가들만더죽게 된다” 고 원망 섞인 투로 말했다. “뾰족한 대책도 없잖느냐”고 되물은 그는“2년 전 악몽이 오지 않길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조류독감 여파로 서해안 각지에서 곧 시작되는 각종 철새 축제도 개최 여부가 불투명하다. 12월초 제2회 세계철새페스티벌을 준비하고 있는 전북 군산시는 홍보를 자제하고 탐조투어를 취소하는 대신 방역활동을 강화할 계획이다. 21일부터 11월말까지 천수만A지구에 날아오는 50여만마리의 철새를 탐조하는 세계철새기행전을 여는 충남 서산시도 올해행사를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좌불안석이다.
2003년 12월 조류독감이 발생해 닭 30만마리를땅속에 묻고 농장과 마을 전체가 폐쇄,집단 이주 위기까지 몰리는 악몽을 겪었던 천안시 풍세면 용정리는 요즘 다시 바람 앞의 촛불 신세다.
11농가가 집단으로 닭을 키우는 이 마을은 조류독감 예보가 발령되면서 그야말로 초긴장상태였다. 마을 초입에는‘외부인 출입금지’ 팻말이 섰고 오가는 사람도 없이 마치 적막강산이다. 농가들은 2003년 당시 인근 하천의 텃새가 축사를 출입해 조류독감에 감염된 것으로 밝혀진뒤농장 전체에 새들이 접근 못하도록 그물망을 쳐놓고 있다.
주민 배종옥(43)씨의 요즘 하루는 방역작업으로 시작해 방역작업으로 끝난다. “농장에서 출하하는 달걀 시세가 추석 전 10개 120원 수준에서 어느새 68원으로 폭락했습니다.” 배씨는“2년 전 닭을 살처분하기 전에 1억원 안팎이던 빚이 3억2,000만원으로 늘었다”며 “마을농장이 재기해 이제 겨우 돈을 만질 만하니까 다시 조류독감 예보 발령이나파산 직전에 몰렸다”고한숨을 쉬었다. 그는“정부와 언론이 대책도 내놓지 않으면서 호들갑을 떨어 농민들이 또 한번 죽게 생겼다”며“인체 감염시 위험하다면서 정작 가장 심하게 노출된 양계농민에 대한 대책은 뭐냐”고 성토했다.
군산=최수학기자 shchoi@hk.co.kr홍성=이준호기자 junhol@hk.co.kr
■ 치킨점 "조류독감 괜찮다고 해도 손님들 안믿어"
14일 농림부의 조류독감 발생예보 발령으로 가금류 생산ㆍ유통업체가 휘청거리고 있다. 특히 중소 유통업체, 동네 치킨점, 식당 등 생계형 영세업자들이 더 큰 타격을 받고 있다.
닭고기 생산업체 하림 관계자는 이날 “이번 주 들어 11일 20%, 12일 30% 정도 매출액이 줄었다”며 “2003년 국내 조류독감 발생 이후 익힌 닭고기는 안전하다는 인식이 퍼져 이번에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경기 파주시에 있는 중소 닭고기 유통업체 보람식품 관계자는 “우리 같은 중간 유통업체들은 9,10월 매출이 지난해 동기에 비해 40~50%나 줄었다”며 “학교급식 납품업체여서 방학이 끝난 뒤 이 시기가 가장 잘 나가는 때인데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다”고 울상을 지었다
. 경기 성남시 하대원동에서 10여평 남짓한 치킨점을 운영하는 서모(53ㆍ여)씨는 “11일부터 아예 주문전화가 뚝 끊겨버렸고 지난달에 비해 매출이 딱 절반으로 줄었다”며 “아무리 튀긴 닭은 괜찮다고 손님들에게 말해도 믿질 않는다”고 속상해 했다. 서울의 한 삼계탕집 관계자는 “아직은 손님들이 동요하지 않고 있지만 2003년의 악몽이 되풀이될지 몰라 걱정이 태산”이라고 말했다.
김한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책위원회 부장은 “대형업체는 자금 여유가 있으니 위험성이 사라질 때까지 견딜 수 있지만 전국 4만5,000여개에 달하는 소규모 치킨점이 입을 타격은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기해기자 shinkh@hk.co.kr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 귀가후엔 손 씻어야… 가열된 고기는 안전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은 14일 조류독감 예보를 발령하면서 놓아 기르는 닭이나 오리를 되도록 실내로 옮길 것을 당부했다. 시설이 여의치 않으면 철새나 철새와 접촉한 텃새 등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물을 주변에 두르면 된다.
조류독감이 의심되면 재빨리 방역당국에 신고해야 한다. 감염 조류의 배설물 1g은 최대 100만 마리의 닭을 감염시킬 수 있다. 아무리 사소한 사안이라도 신고(전화 1566_4060, 1566_9060)해야 한다. 닭이나 칠면조는 감염되는 즉시 사망하지만 오리는 별다른 증상이 없어 더 문제다. 오리가 정상적으로 보이더라도 ▦산란율 감소 ▦호흡 곤란 ▦식용 부진 등의 증상이 있으면 즉시 조치를 취해야 한다.
농림부 관계자는 “지난해 조류독감 발생 당시의 조사에 따르면 철새가 농장에 직접 침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며 “밤에 먹이를 찾으러 오는 텃새를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손이나 호흡기를 통해 사람에게 감염된다. 사람이 감염되면 고열, 근육통, 콧물, 후두염 증상을 보이다가 폐렴 등의 합병증을 일으킨다. 전문의들은 사람들이 많은 곳을 피하고 외출한 뒤 귀가하면 반드시 손을 씻는 등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당부했다. 조류독감이 발생한 나라를 방문할 때에는 일반 독감 예방접종을 권하고 있다. 가금류나 야생조류 사육농가, 판매장, 철새 도래지 등의 출입을 삼가야 한다. 삼성서울병원 감염내과 오원섭 교수는 “열, 콧물, 기침 등 호흡기 이상증상이 있으면 즉시 병원을 찾아 진단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조류독감의 경우 제대로 요리된 닭고기나 오리고기, 달걀 등은 감염 위험이 없다.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열에 약해 60~70도 이상에서는 30분, 75도 이상에서는 5분만 끓이면 즉시 죽기 때문이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김신영기자 ddalgi@hk.co.kr
■ 조류독감 터키까지 확산… 유럽 방역 비상
아시아 조류독감이 터키까지 확산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유럽 전역에 방역 비상이 걸렸다.
마르코스 키프리아누 유럽연합(EU) 보건ㆍ소비자보호 담당 집행위원은 13일(현지시간) “터키에서 11일 발견된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아시아에서 수많은 사람을 숨지게 한 H5N1형으로 밝혀졌다”며 “유럽 각국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는 독감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EU는 14일 브뤼셀에서 각국의 보건 당국자를 소집해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조류독감 치료제인 항바이러스제 확보를 위해 10억 유로 규모의 기금을 조성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 방역대책을 논의했다. EU는 회원국 정부에 조류독감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 시베리아로부터 날아오는 겨울 철새들의 이동 경로를 철저히 감시하고 노인ㆍ어린이를 중심으로 독감 예방 접종을 강화하고 치료제 비축에도 만전을 기해달라고 권고했다.
EU는 터키산 가금류 수입 금지에 이어 조류 독감 의심사례가 발생한 루마니아산 가금류 수입도 금지했다. 루마니아 보건당국은 지난주 다뉴브 지역에서 발생한 H5형 조류독감 바이러스 샘플을 영국의 연구소에 보냈으나 아직 검사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4일 웹사이트를 통해 “H5N1 바이러스가 새로운 지역으로 확산하면서 인간 감염 피해도 늘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남아시아 조류독감 다발지역을 순방 중인 마이클 리빗 미국 보건장관은 14일 마지막 방문국 베트남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조류독감이 확산될 가능성은 높다”며 “조류독감의 인간 감염을 조기 차단하기 위해 모니터링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조류독감 확산 방지를 위한 국제적 모니터링 시스템 구축을 위해 2,500만 달러를 지원키로 했다고 덧붙였다.
문향란 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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