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의 연금술을 한껏 펼쳐 보이던 50대의 성공한 화가 A씨. 어느 날 교통 사고로 뇌에 손상을 당한다. 이로 인해 완벽한 색맹이 된 그는 일체의 사물이 흑과 백으로 보이는, 끔찍한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검은 색 토마토는 역겨워서 도저히 먹을 수 없다. 아내의 회색 피부에도 소름이 돋는다. 그토록 사랑하던 그림마저 그릴 수 없다. 곧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이 엄습한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 섰을 때 희망이 살짝 고개를 내민다. 그는 ‘흑백 세상에서나마 최대한 충실하게 살자’고 다짐한다. 그러자 일찍이 없던 놀라운 감각이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침에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며 핵폭발의 이미지를 읽어낼 수 있는, 전에는 없었던 창조적 눈을 지녔다는 사실을.
질병은 무섭다. 사람의 영혼과 육체를 갉아 먹는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이 악마적 손길을 피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미국의 신경과 의사이자 ‘소생’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등 뇌신경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의 저자인 올리버 색스는 질병에 숨겨진 이면을 읽어낸다.
화가 A씨의 경우처럼 결함과 장애 그리고 질병은 역설적이게도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상도 못했던 잠재적인 능력이 발현되며 새로운 성장과 진화를 맞이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물론 놀라운 복원력과 적응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행동 양식을 찾아내 생존에 성공할 경우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올리버 색스는 전색맹인 화가 A씨를 포함해 자신이 만난 일곱 명의 독특한 환자들을 소개한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실룩거리고 얼굴을 찡그리며 이상한 몸짓을 하고 때로는 욕설을 퍼붓는 질환인 투렛 증후군부터 자폐증, 기억상실증까지 이들은 한결같이 다양한 신경 질환의 습격을 받은 이들.
청소년기의 기억에 갇혀 영원한 히피로 살고 있는 그레그 F와 일곱 살 때부터 투렛 증후군을 앓았지만 서른 일곱에야 그것이 병이라는 걸 알게 된 외과 의사 베넷. 화가 A씨와 달리 어린 시절 시력을 잃었다가 50년 만에 수술로 눈을 뜨게 된 버질. 자폐증 판정을 받았지만 동물학자로, 가축 시설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템플 그랜딘까지.
저자는 이들이 “의학계의 전통적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사례’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한 독특한 인간, 즉 ‘화성에서 온 인류학자’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복과 치료의 대상으로만 보이는 질병에 숨은 의미를 만만치 않은 글 솜씨와 전문 의학 지식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재주가 빛난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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