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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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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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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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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꾀죄죄함 완연한 병객이라/ 어디에서 왔기에 학처럼 말랐는가…”

1598년 1월 중국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이정구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이렇게 탄식했다. 1596년 정유재란 당시, 조선과 왜가 명을 협공하려 한다는 보고가 명 조정에 접수되자 이정구는 조명(朝明) 오해의 해소라는 막중한 임무를 안고 사행(使行)에 나섰던 것이다. 그 길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새벽에는 안개, 낮에는 먼지, 저녁에는 바람이 그를 괴롭혔다. 서른 넷의 젊은 나이였으나 베이징에 도착한 이정구는 병자같이 초라한 행색으로 변해있었다.

연행(燕行)은 우리나라에서 원, 명, 청의 수도였던 연경(燕京ㆍ베이징)을 오가는 사행의 통칭어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500여명이 동원됐으며 가고 오는데 석 달, 연경에 머무는 데 두 달 등 적어도 다섯 달이 걸렸다. 랴오둥(遼東) 벌판 찬바람 속에서 풍찬노숙을 하고 자욱한 황사를 뒤집어 썼다. 양국의 갈등을 풀고, 이익을 위해 상대를 설득할 때가 많았으니 심적 부담은 또 얼마나 컸을까.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 길을 가다’는 옛 사행 길을 따라 걸으며 저술한 역사 기행서다. 하지만 문헌에 나타난 선조들의 느낌과 감상이 중심이어서 기존 답사 보고서와는 성격이 다르다.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정년 퇴임한 김태준,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연구 교수 이승수,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김일환 등 저자들은 2003년 2월, 8월, 12월 그리고 금년 1월 연행 길을 직접 답사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와 중국은 지리적 환경에서 비롯된 숙명적 관계였다. 특히 조선은 명 청 교체라는 변동을 겪으면서도 중국 중심의 외교 질서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중국의 세련된 한문화를 지속적으로 수용했고 지식인들은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심지어 그들의 관점까지도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우리 고유 문화가 위축되고 독자적 세계관의 형성이 늦어졌으며 경제와 안보에서 구멍이 생기기도 했다.

이는 연행에 대한 평가에서도 마찬가지다. 한편에서는 치욕스러운 사대외교였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적인 무역제도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평가가 어떻든, 많은 조선인이 수백년 동안 연행을 했고 수백권의 여행기를 남긴 것이 사실이다. 특히 18세기로 접어들면서 지적 호기심이 강했던 선비들은 견문을 넓히고 세계와 호흡할 수 있는 기회로 연행을 받아들인다.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가 그랬다. 이들은 이국적 풍물에 대한 흥미의 차원이 아니라, 연행을 통해 학문적 가설과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세계 정세를 파악하며 그래서 조선을 잘 사는 나라로 만드는 계기를 얻으려 했다.

연행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그랬던 만큼 이들이 받은 충격도 컸다. 박지원은 작은 마을 책문(柵門)에서 받은 충격을 이렇게 적었다. “민가들은 다섯 들보가 높이 솟아있고 띠 이엉을 덮었는데 등성마루가 훤칠하고 문호가 가지런하고 네거리가 쭉 곧아서…사람 탄 수레와 화물 실은 차들이 길에 질펀하여…중국의 동쪽 변두리임에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대도시 선양(瀋陽)에 도착한 뒤 그는 특유의 호기심을 발휘한다. 하인에게 뒷간에 간 것으로 해두라고 일러둔 뒤 몰래 숙소를 빠져 나와 미리 보아 둔 상점에서 이틀 밤을 지새우며 사람들과 필담을 나누었다. 그는 밤새 마신 술과 안주의 품목에서부터 현지인이 말한 골동서화 감식법, 청나라의 제도와 분위기 그리고 상업예찬론 등을 ‘열하일기’에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조선이 중국의 내면까지도 속속 만날 수 있는 통로는 연행이었다. 그리고 연행을 통해 중국 너머 먼 세상과도 접속할 수 있었다. 연행 길을 선진 문명과의 조우를 꿈꾼 조선 지식인의 실크로드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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