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암(畵岩)’. 말 그대로 ‘그림 바위’다.
바위들이 모여 몽유도원도에서나 볼 듯한 바위꽃 군락지를 이뤘다. 첩첩산중 강원 정선땅 화암이 그 꽃바위다. 금강산에 필적할 아름다움을 지녔다 해서 붙은 이름, ‘소금강’이 과장 아니다. 동면 화암1리의 424번 지방도와 421번 지방도의 분기점에 솟은 화표주에서 몰운1리의 몰운대까지, 4km를 쭉 에워싼 명승이 그 곳이다.
소금강을 감상하는 방법은 2가지다. 드라이브가 손쉽게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면, 소금강을 내려다 보며 걷는 화암약수 - 몰운대 등산로는 곰곰이 풍경을 곱씹게 한다.
하늘이 빚어놓은 그림바위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하늘로 오른 길을 택했다. 이날 따라 새벽부터 빗줄기가 거셌다. 초록을 씻어내는 가을비다. 화암약수 주차장에서 이어진 좁은 오솔길을 따라 만들어진 화암 트레킹 코스(8km)는 그렇게 시작했다.
인간의 흔적이 좀체 느껴지지 않는 등산로. 흙길은 두 발을 한 데 붙이고 서 있기 어려울 정도로 좁은데다, 그나마 풀 포기가 비집고 올라와 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다.
그러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금세 급경사. 산행 전 들이킨 화암 약수의 효능이 떨어질 무렵이어서인가, 종아리가 시큰해 오고 “헉, 헉” 숨소리가 깨진 배기통 소음을 닮아간다. 그 때, 솔밭의 꼭대기에 ‘솔밭 쉼터’라는 안내판이 나타났다. ‘전면의 아름다운 풍경이 소금강이며 등산하시면서 금강대, 설암, 신선대, 비선대 등의 주변 절경을 탐방하시면서 식수가 필요하신 분은 신선암과 비선대 사이의 계곡수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능선을 타며 편하게 주변을 감상하는 평탄한 코스라는 신호다. 도토리 잔뜩 떨어진 오솔길을 걸어 금강대를 지나 한참을 가니 설암이다. 4계절 중 눈 속의 풍경이 최고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샛길을 타고 설암에 가까이 다가섰다. 바위는 위태로운 절벽이다. 이끼마저 가득해 나그네의 발목을 잡는 듯 하다. 그러나 바위와 나무 사이로 살짝 드러나 잠시 보여 주는 풍경에 마음은 동한다. 등산화 조여 매고 손을 짚어가며 조심스레 바위 위로 올랐다.
일순간 시야가 탁 트이니 곧 선경이다. 700여m 낭떠러지가 주는 공포감도 절경앞에서는 맥 못 춘다. 수직으로 솟은 기암은 돌단풍으로 곱게 화장을 했고, 산자락에 갇힌 비구름과 안개는 바람을 타고 제멋에 겨워 희롱한다. 저 멀리 아스팔트 길이 동대천을 따라 굽이굽이 휘돌아 나가는데, 안개에 젖어 아련히 보이는 그 도로를 만나 설암이 조망하는 화암풍경이 완성된다. 인공도 이럴 땐 자연 그 이상의 맛이 난다.
가을이 짧다는 정선. 산이 깊고 높아 여름이 지나면 금세 겨울로 접어든다는 땅이다. 이 가을비가 그치면 단풍은 절정을 맞으리라. 짧아서 더욱 강렬한 빛으로 화암을 태우리라.
설암에서 신선대까지는 2.5km가량이다. 멀고 지루한 길 중간 중간에 쓰러진 나무가 가로막아 힘겹게 돌아가야 한다. 신선대의 전망도 설암 못지않다. 아니, 풍경의 호쾌함은 그 이상이다.
첩첩의 장쾌한 산들이 물결치고 붉은 빛의 ‘그림 바위’가 화려한 수를 놓고, 물과 길이 유유히 흘러가는 진경 산수화다. 설암이나 금강대에서의 조망이 위험한 반면 비교적 넓은 신선대에서는 한결 편하고 안전하다. 그래서인지 내려다 뵈는 풍경마저 훨씬 여유로워 보인다.
4km 가량을 더 걸어 내려오면 숲이 끝나면서 한치마을로 길이 이어진다. 한치마을은 50여 가구가 어울려 사는 요즘 산골에서는 보기 드문 ‘큰 마을’이다. 한때 금광이 12개를 헤아렸을 만큼 대규모의 금광촌이었다.
지금은 정선에서 손꼽는 ‘농촌 체험 마을’로 그 명성을 이어 간다. 한치마을 뒤로 해서 소금강의 마지막인 몰운대로 이어진다. 천변에 수직으로 솟은 기암절벽. 말마따나 구름도 쉬어간다는 경승지다. 깎아 세운듯한 절벽에 아슬아슬하게 뿌리를 내린 노송과 이제 막 색이 오르기 시작한 단풍이 어우러진 풍광이 곱다.
8km 되는 화암약수 - 몰운대 산행길을 반대편 몰운대에서 시작하면 급한 오르막이 없어 산행을 부담스러워 하는 이들에게 권할만하다. 하지만 산은 역시 오르는 맛이라고 화암약수에서 시작해 만나는 풍경은 같은 풍경이라도 힘겹게 얻은 것이기에 더욱 큰 감동을 선사한다.
정선=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정선의 가을/ 동강
태백 준령이 고아낸 맑은 물인 골지천과 송천은 한강의 첫 번째 나루인 아우라지에서 만나 드디어 강의 품새를 띠게 된다. 오대산에서 흘러내린 오대천과 만난 이 조양강이 정선읍을 지나 가수리에서 동남천을 만나 바뀌는 이름이 바로 그 말 많고 탈 많았던 동강이다.
영월 읍내에서 서강을 만나 남한강이라는 이름을 얻기 까지 51km를 산자락을 휘휘 돌고 또 돌아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 동강은 쉴 새 없이 굽돌며 정선, 평창, 영월땅을 적신다.
첩첩의 산이 품은 동강을 즐기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강물로 들어가는 래프팅과 강을 굽어 보는 트레킹, 그리고 강과 함께 달리는 드라이브다.
동강에서 강변을 따라 차도가 난 구간은 영월의 영월읍 - 섭새 거운교, 평창의 진탄나루 - 문희마을, 그리고 정선의 광하교 - 운치리 등 세 곳이다.
영월과 평창의 강변길은 짧기도 하거니와 막힌 길이라 되돌아 나와야 하는 수고가 뒤따른다. 반면 정선의 광하교 - 운치리 길은 펼치면 20여km 되는 길이로 드라이브에 안성맞춤인데다 외딴 마을을 몇몇 거치면서 삶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다. 아스팔트 포장이었다가 좁은 콘크리트 포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흙먼지 일으키는 비포장도 골고루 섞여 지루할 틈이 없다.
정선읍에서 나와 평창행 42번 국도를 타고 가다 광하교 직전에서 길을 벗어나 다리 밑으로 들어가면 동강 관리 사무소가 나온다. 동강이 생태 보전 지역으로 지정된 까닭에 1인 당 1,500원의 입장료를 받는다. 돈 받는 드라이브길인 셈이다. 덕분일까, 오가는 차량도 뜸하다.
길을 벗삼아 흐르는 동강의 물빛은 여전히 짙은 초록이다. 올 여름 래프팅족들의 소음이 한껏 메아리 쳤을 강에는 석회암 절벽으로 정겹게 둘러 싸여 있다.
첫 번째 만나는 마을은 귤암리로, 산골치고는 제법 규모가 크다. 길은 마을 안을 지나 한참을 달린다. 가수리 수미마을의 가수분교 교정에는 570년이 넘었다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장려하다. 계속 휘어져 나가던 길은 운치리를 지나 고성분교 앞의 고성 동강관리소에까지 닿는다.
사행천으로 뉘엿뉘엿 흘러가는 동강을 내려다 보는 가장 좋은 전망대는 백운산(882.5m)이다. 동강을 끼고 평창과 정선의 경계에 서있다. 백운산을 오르는 등산로는 동강변에 있는 운치리의 점재 나루와 제장 나루, 연포 마을 등에서 시작된다.
제장에서 오르는 코스가 반긴다. 등산로 입구는 포도밭. 수확을 끝낸 밭에서는 땅에 떨어져 썩어 가는 포도 냄새가 짙다. 달큼하면서 시큼한 냄새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저 멀리 등산로 입구에서는 ‘산이 험하니 전문가만 등반하기 바란다’는 안내판에 지레 다리가 풀리는 듯.
이제 마르기 시작한 풀섶의 길을 지나니 강변의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급경사가 시작됐다. 바닥에는 날카로운 돌이 쫙 깔려 만만찮은 부위기를 낸다. 허덕이며 오르는 길에서 반대편에서 넘어오는 산악 회원 한 무리를 만났다. 워낙 기복이 심한 산행길이라 얼마 안 가 다들 땀이 한 바가지씩이다. 그러나 눈빛은 맑았고 입가엔 미소가 가득하니, 얄궂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심하고 힘내서 오르라는 격려를 받고 다시 오르는 산길에는 벌개미취 간간히 피어 눈을 즐겁게 한다. 스테레오마냥 양 옆으로 들려 오는 동강의 물소리도 풀려 가는 다리에 힘을 보탠다.
두번째 봉우리에 오르자 꼭대기 부근에 한 산악인을 기리는 추모비가 서 있다. 여기서 바라보는 동강의 물줄기는 “과연 동강”이란 말을 절로 나오게 한다. 용틀임을 하며 휘휘 굽어진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낙동강의 하회, 회룡포, 경천대 등 눈에 익은 완만한 물돌이가 감히 따라 올 수 없다. 남성미, 동강 물굽이의 키워드다.
내가 선 능선을 가로 지르면 채 50m도 안될 거리를 이리 돌고 저리 또 돌아 굳이 에둘러 가는 강물. 하기사 물이야 서둘러 갈 일이 뭐 있으랴. 강은 산을 감싸 안고, 산은 또 그 강을 둘러 안는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이 산을 넘지 못한다는 관용적 표현은 일단 뒤로 물러 앉자. 이 곳 동강을 만나, 물과 산은 서로를 그렇게 탐하고 있으니.
정선=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정선의 가을/ 오지마을
정선의 땅은 어딜 가건 평탄한 곳이 없다. 끊임없이 물결 치는 산맥 사이 사이에 사람들은 들어가 삶의 터전을 일궈왔다. 산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구고, 산채를 뜯으며 삶을 영위했던 곳이다. 그 터전 하나 하나를 두고 외지인들은 ‘오지’라 한다.
조금씩 길이 뚫리면서 하나 둘 넓은 세상에 노출됐지만 여전히 많은 오지를 품고 있는 땅이 정선이다. 그래서 오지의 풍경이 필요했던 영화는 상당수가 정선에 와서 촬영됐다.
동강 강변길 고성 동강관리사무소를 나와 신동읍으로 가다 고성교 부근에서 ‘연포 마을’이란 이정표를 따라 작은 길로 빠져 나온 뒤 큰 고개를 넘고 동강의 낮은 다리를 건너자. 차승원 주연의 영화 ‘선생 김봉두’를 찍었던 조그마한 학교가 나타난다.
김봉두가 봉투 사건으로 발령난 곳이다. 극중의 ‘산내 분교’ 촬영이 이뤄졌던 곳이 폐교된 연포 분교다. 주인공이 묵던 사택과 수돗가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연포마을은 동강변 마을 중 가장 때가 덜 탄 곳이다. 많은 마을들이 길이 뚫리면서 국적 불명의 통나무집 펜션들로 뒤바뀌고 있지만, 이 곳에는 아직도 흙벽집들이 도처에 남아 있다. 분교 앞은 동강이 휘돌아 나가고 그 앞에 20층 이상의 빌딩 높이의 절벽과 산들이 가로 막고 서 있다.
동강변 드라이브하다 만나는 가수리와 고성리는 황정민, 유동근 주연의 ‘마지막 늑대’를 찍은 곳이다. 일에 지친 강력반 형사가 일하기 싫어 찾아 온 영화 속 ‘무위 마을’이 이 곳이다.
신동읍의 함백 새비재는 이른바 ‘엽기 소나무’ 덕에 한때 많은 관광객들이 몰렸던 곳. ‘엽기적인 그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소나무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이성원기자
■ 여행수첩/ 동강
정선으로 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영동고속도로 진부IC에서 나와 59번 국도를 타고 오대천 절경을 내내 감상하며 내려오는 길이다.
빠르기는 중앙고속도로 제천IC에서 나와 38번 국도로 영월을 지나 신동읍으로 해서 들어오는 길이지만, 영동고속도로 장평IC 등을 통해 평창을 지나 42번 국도로 비행기재 터널을 지나오는 길이 더 빠르다.
화암약수 - 몰운대 산행을 할 경우 되돌아오는 차편이 여의치 않다. 버스는 1시간에 1대꼴로 운행한다. 정선읍이나 카지노가 있는 사북 등지에는 택시가 많지만 동면 지역을 운행하는 개인 택시는 단 한대 뿐이다. (033)562-2034
소금강에 가까운 민둥산은 억새의 명소다. 카르스트 지형으로 유명한 발구덕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40분쯤 오르면 정상의 억새밭이 광활하게 펼쳐진다.
정선의 먹거리 중 최고 인기 메뉴는 곤드레밥. 향이 없어 나물 취급도 받지 못했던 곤드레가 최근 항암 효과 등의 소문을 타고 유명해졌다. 신동읍 예미리 외곽 도로 앞에 있는 정원광장식당(033-378-5100)과 화암약수 주차장 언저리에 있는 두메산골(563-5108) 등이 잘 한다. 곤드레나물을 넣고 밥을 한 뒤 들기름 등을 곁들여 양념 간장에 비벼 먹는다.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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