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와인을 좋아하세요?” 이 질문에 머뭇거리는가?
와인은 술 아닌 ‘약주’로 대접 받고 있다. 레드 와인의 폴리페놀은 항암 효과가 있다는 학설이, 프랑스 인들은 매일 한 잔씩 마시는 와인으로 비만을 방지한다는 속설이 널리 인정을 받은 까닭이다.
고급 와인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져 비즈니스 접대용 리스트에 올라 사회적 물의를 빚을 정도의 아이템이 되어 가고 있고,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와인 문화’가 하나의 교양 과목처럼 우대 받고 있다. 어찌 보면 기껏해야 ‘마실 거리’의 일종인데 너무 과열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와인이 사랑 받고 있는 실정.
사실 와인은 우선 잔에 담긴 모양새가 세련되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혈색이 좋아지는 것은 둘째로 치자. 특히 남녀가 만나 데이트를 할 때에 ‘술’을 마시자고 하면 거부감을 보이는 여인네들도 와인 잔을 마주하고 앉자 하면 조금은 너그러워지고 말이다.
최근 개봉한 어느 영화의 스틸 사진 가운데 가난한 연인이 고무 욕조에 물을 채워 목욕 하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 두 사람의 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 있는 장면을 재미있게 보았다.
그 때문인지 초라한 고무 욕조 신(scene)이 오히려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만약 와인 잔 대신 소주잔이나 탁주 사발이 들려 있었다면 그 분위기는 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와인이 대우받는 것은 어쩌면, 그게 연출해 내는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와인에 졸인 닭
와인에 관련된 요리들을 뒤져보니 프랑스 사람들이 집에서 해 먹는 닭요리가 생각난다. 닭고기를 유난히 많이 먹는 그네들이 부위별로 남은 닭을 모아서 끓여내는 요리다. 준비도 무척 쉬운데, 큰 용기에 닭을 모아 넣고 냉장고 속 남은 야채를 더해 와인을 붓는 거다.
본래는 프랑스의 내륙 지방인 부르고뉴에서 많이 먹는 요리이기 때문에 ‘부르고뉴 산(産)’ 레드 와인을 붓는 것이 정석이지만, 나는 가격이 싸고 만만한 와인을 쓴다. 도리탕용 닭 한 팩에 와인 한 병을 꼬박 넣어야 된다고 치면 저렴한 와인을 쓰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야채는 감자, 양파, 대파, 그리고 당근 정도가 필요한데 도리탕 만들 때 넣음직한 야채들에 토마토와 샐러리 정도만 더 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준비해서 하룻밤을 푹 재워야 한다는 사실. 닭의 쫄깃한 살코기 속으로 와인이 샤샥 스며들어야 졸였을 때 맛이 좋다. 조만간 손님을 치르기로 했다면 미리 재워 두었다가 푸짐하게 끓여 내고, 할인 마트에서 잘 고른 와인을 곁들이자.
가을맞이 와인 파티가 별 거 아니다. 여기에 기다란 바게트를 준비하면 남은 국물에 찍어 먹을 수 있으니 여분의 안주가 필요치 않다. 어울리는 와인으로는 너무 무겁지 않은 레드 와인 계열인데, 캘리포니아나 호주 산(産)도 무난하겠다.
● 게살 카나페
TV드라마나 영화의 파티 장면을 보면, 멋진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이들이 자잘하고 예쁜 카나페를 오물거리는 모습이 나온다. 와인을 곁들여가며 요리를 먹는 정찬이 아닐 바에야 한입 꺼리 카나페가 오히려 와인의 맛을 돋워줄 수 있다.
카나페를 만드는 방법은 수백 가지가 있다. 한 입에 쏙 넣어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관건이므로 요리사 능력껏 개발 할 수 있는 레서피는 무궁무진한 셈이다. 크래커에 치즈를 한 조각 올리거나 도톰하게 썰어 초절임한 오이에 두부를 올려도 좋다. 작게 썬 바게트를 구운 다음 토마토와 올리브를 올려도 맛있고, 명란을 참기름과 쪽파로 양념해서 튀겨낸 누룽지에 올려도 역시 카나페다.
시판되는 게맛살을 잘게 찢고 베이컨, 계란과 함께 볶은 다음 토스트 위에 올려 먹는 카나페는 비교적 재료비가 저렴하다. 화이트 와인과도, 레드 와인과도 두루 잘 어울 릴 만큼 요리 맛이 강하지 않은 것도 장점. 식빵 몇 장에 게맛살 한 팩, 베이컨과 달걀 두 어 개면 여섯 명 정도의 인원이 안주 삼을 수 있다.
다음 달이면 선을 보일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와 같이 농도가 옅은 레드 와인이나 해산물에 잘 어울리는 이태리 산 화이트 와인을 권한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에서도 와인이 생산된다. 서해의 대부도에 가면 포도밭이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데, 거기서 만들어진 와인을 바로 살 수 있다.
그 곳에서 바다와 맞닿은 포도밭을 거닐고 빛이 연한 와인 한 잔을 마시다 보면, 이 밭의 포도가 세월을 안고 숙성해서 내입에 담기게 되는 일련의 과정에 대해 마음이 짠해진다. 어찌 보면 와인이 우리 사는 모습과 참 닮아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의형제 사이셨던 분이 지난 주, 4년 만에 할아버지 뒤를 따라가셨다. 소식을 접한 밤, 나는 또 와인을 한 잔 마셨고. 와인이나 우리나 세상에 나오면서 이미 ‘소모’될 운명을 안고 태어난다는 점에서 동질감마저 느꼈던 밤이었다.
고르고 고른 땅에서 정성으로 기른 포도로 한 병 한 병 담근 와인은 맛도, 향도, 가격도 제각각이지만 그 말로(末路)는 같다. 우리네 인생 역시 각자 다른 세상을 살더라도 눈 감을 때는 속수무책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선인(善人)을 만나서 구름보고 달 보며 와인 한잔 나눌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소박한 욕심만 반짝이게 되었다.
푸드채널 ‘레드 쿡 다이어리’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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