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를 쌓아 놓고 사는 세상은 이미 빛의 세상이 아니다. 인류와 지구를 몇 번이라도 파멸시킬 수 있는 핵, 많은 나라들이 그 핵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국력을 기울인다.
과학이 진보하고, 세계화의 물결에 따라 이제는 세계가 지구촌이 됐다는 21세기, 인류는 왜 아직도 핵을 끌어 안고 늪에서 허우적대는가? 핵을 두고 펼치는 각축을 살펴본다. 그들이 우리와 지구와 인류의 운명을 쥐고 있다.
핵무기의 임무
군사에서는 임무와 목표를 구분한다. 쟁기를 끄는 소가 농사(목표)를 짓는 것은 아니다. 소는 그저 쟁기를 끌고 논이든 밭이든 갈면(임무) 된다.
마찬가지로 억제는 핵무기의 임무가 아니다. 적의 핵 공격에도 살아 남아 보복 공격을 하는 것이 핵무기의 임무이다. 억제는 그 임무의 목표다.
미국 행정부는 핵무기와 관련한 네 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즉 미국과 동맹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적으로 하여금 미국과 동맹국에 대한 공격을 애초부터 단념하도록 하며, 공격할 의사를 가지고 있을 경우 공격을 억제하고, 그래도 공격하면 핵무기를 동원해 가차 없이 표적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핵무기에게 부여된 임무, 그것은 할당된 표적을 확실하게 파괴하라는 것이다. 핵무기를 사용하여 파괴할 표적은 어디서든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그 표적을 파괴하기에 가장 적합한 무기를 찾는다면 핵무기가 선택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비교하여 비용 대 효과를 분석하는 기법이 있다. 핵무기의 비용에는 표적을 파괴하기 위한 핵탄두, 그것을 운반하는 비용, 그리고 핵 폭발에 따른 피해중 숫자화할 수 있는 아주 일부분만을 포함했다.
핵무기 피해는 비용 계산의 한계를 넘기 때문이다.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 사이에 그 효과의 차이는 미미하지만 비용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핵무기가 불리하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핵무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런 분석을 할 때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비교하지 않고 이 핵무기와 저 핵무기를 비교한다.
핵 태세 검토보고와 그 파장
미국에 핵 태세 검토보고(NPRㆍ Nuclear Posture Review)라는 것이 있다. 이름만으로는 미국의 핵 배치현황과 핵무기 상태를 조사하는 것쯤으로 보인다. 미국은 어마어마한 일에 아주 단순한 이름을 붙이는 데 능숙하다.
이 보고서는 미국 국방부가 새로운 안보환경에 따라 미국의 잠재적 적국이나 단체가 보유한 미국에 대한 위협 능력을 분석하고 이에 대응하는 핵 전력과 장기적 핵 대응 전략을 의회에 문서로 보고하는 것인데 중요한 내용은 비밀이다.
1993년에 착수하여 1994년에 완성한 1차 핵 태세 검토보고서, 그리고 2002년 1월에 발표한 2차 보고서가 있다. 9ㆍ11 테러 이후 미국의 안보개념이 공세적으로 변화하는 중요한 시기에 작성한 2차 보고서에는 두 가지 민감한 사항이 포함됐다.
첫째, 이라크 이란 리비아 시리아 그리고 북한을 핵 공격 대상 국가에 포함시켰다. 테러조직을 지원하는 불량국가라는 것이다.
둘째, 포괄적 핵실험금지협정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국제적 비확산 노력을 미국 스스로 거스르고 있다.
미국으로부터 핵 공격 대상으로 지목된 나라들이 가만히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을 리 없다. 거세게 반발하면서 미국의 핵 공격에 대비한 자위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북한이다.
북한은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에 따라 핵 프로그램을 동결했는데 미국이 왜 느닷없이 핵 공격 대상국가에 포함시켰느냐고 비난하고 나섰다.
게다가 제네바 합의에 의한 핵 동결의 대가로 북한에 건설중이던 경수로도 예정보다 공사진도가 대단히 지연되고 있었다. 북한은 미국이 핵무기로 북한을 공격한다고 위협하는 한편 경수로 건설을 고의적으로 지연하여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다음 수순으로 미국의 핵 공격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 자위목적상 부득이 핵 무기 개발을 재개할 수 밖에 없다는 논리를 폈다. 그에 따라 핵 연료봉을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이 먼저 제네바 합의를 어겼다고 반격했다.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HEU) 기술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적발했다는 것이다.
여러 증거중에 하나로 파키스탄의 칸 박사가 중심이 된 국제 네트워크에 북한 핵 개발계획이 포함됐다면서 리비아에서 입수한 농축우라늄을 북한 생산품이라고 밝히고 나섰다. 선 후를 가릴 수 없이 얽히고 설킨 북한 핵 문제, 6자 회담에 따라 검증이 이루어지면 그 실상이 밝혀 질 것인가?
핵확산금지협정
국제적 핵 문제를 다루는 가장 강력한 다자간 협력 수단이 핵확산금지협정(NPT) 체제이다. 아무리 많은 나라가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그리고 중국 등 이미 핵무기를 가진 다섯 나라의 통제체제이다. 묘하게도 이들 모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들이다.
핵 보유국은 비핵 보유국에게 핵무기와 관련된 어떤 기술이나 장비도 제공해서는 안되며, 비핵 보유국은 그런 기술이나 장비를 확보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핵확산금지다. 핵무기는 위험한 물건이니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기존의 다섯 나라 말고는 일체 접근하지도 말고 만들지도 말라는 제도와 규칙이다.
국제사회에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없다. 공정, 불공정은 패권국가가 판단한다. 금지된 것을 가진 그들만 절대 안보의 특권을 누린다.
NPT 체제를 수용한 회원국들도, 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 잣대와 일방주의, 미국 예외주의에 대해 자주 비난한다. NPT에 가입도 않은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밀리에 핵무기를 개발한 인도와 파키스탄, 그 두 나라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대표적 사례다.
미국은 국제사회를 동원하여 핵무기를 개발한 그 두 나라를 제재했었다. 그러나 형편이 바뀐 이제는 두 나라 모두 미국의 묵인아래 편안한 핵무기 보유 국가들이 됐다.
9ㆍ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은 파키스탄에 가했던 제재를 해제하고 매우 긴밀한 군사협력관계를 수립해야 했다.
인도의 경우는 더욱 아이러니하다. 대 중국 포위망의 한 축으로 인도를 끌어 들인 미국은 이후 평화적 이용이라는 명분으로 인도에 핵 기술을 수출하기에 이른다.
모든 회원국은 핵을 평화적으로 이용할 권리를 가진다고 NPT는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것이 평화적 이용인지는 명확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어느 나라든 핵 발전소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평화적 이용에 대한 정의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를 생산할 목적으로 핵 발전소를 건설해도 국가에 따라서는 핵무기 프로그램과 연계하여 의심을 받기도 한다. 이란의 핵 발전소 건설을 둘러 싼 국제적 논란을 보면 NPT 체제의 모순을 알 수 있다.
미국 자신은 보유한 기존 핵무기의 성능을 개선하고 새로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면서도 다른 나라들에게는 핵확산금지협정을 지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미국 예외주의의 극단적 표현이다. 미국이 종종 내 비치는 패권주의적 발상의 전형이다.
패권, 다시 한번 살펴보자. 어떤 나라가 어떤 체제를 만들고 그 체제에 속한 다른 나라들을 통제하거나 지배하는 것을 패권(Hegemony)이라 부르고 그런 힘을 가진 나라를 패권국가라 한다.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기구, 규칙, 제도를 만들고 다른 나라가 그것을 따르도록 강제한다. 규칙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패권국가의 권리이다.
만일 어느 나라가 그 규칙과 제도를 어기면 패권국가는 말(위협과 설득), 돈(경제적 지원) 그리고 힘(군사력)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규칙을 지키도록 하고, 최후의 수단으로 가혹한 물리력으로 강제집행을 하거나 징계한다.
돈, 즉 국제통화기금(IMF)체제, 그리고 위협과 설득을 행사하는 핵확산금지협정체제 등이 미국의 패권적 지배권 행사의 중요한 수단으로 인식돼 왔다. 때로는 미국이 주도하던 체제를 무시하고 새로운 체제를 통해 패권적 물리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충분한 지지를 확보할 수 없게 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나아가 유엔의 권능을 무시한 채 동맹군을 이끌고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 대표적인 살례다. 국제법에 따르면 유엔의 승인이 없는 전쟁은 침략전쟁으로 간주된다.
미국은 핵무기를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진 것 같다. 미국이 자유 민주 그리고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생각이 어떠한 수단도 미국이 사용하면 정당하다는 논리의 바탕이다.
그것이 패권적 사고의 미국식 표현이다. 패권의 유지와 확대를 위해 선택하는 수단 앞에는 미국이 늘 앞세우던 고상한 이념과 가치가 빛을 잃는다.
■ 미국 핵무기의 대표적 임무
1. 미국과 동맹국에 대한 적의 핵 공격에서 살아 남아 핵으로 보복 공격을 한다.
2. 미국과 동맹국에 대한 적의 화학ㆍ생물무기 공격에서 살아 남아 핵으로 보복 공격을 한다.
3. 적의 취약성을 드러내 핵무기 개발의 의지를 꺾는다(확산 방지).
4. 전역(戰域ㆍTheater)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핵 공격을 실시한다.
5. 러시아의 핵 전력 중심에 대하여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핵 공격을 실시한다.
6. 지역의 재래식 무기에 의한 공격에 핵 무기로 보복 공격한다.
7. 적에게 겁을 준다.
8. 전투와 지역 전쟁을 종결한다.
윤석철객원 기자 ysc@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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