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사상으로 중무장한 조선시대 대가(大家)들의 그림을 여성이나 어린이, 하인과 같은 당대 비주류의 시선으로 보는 건 어떨까, 그들의 눈으로 보면 작품이 어떻게 달라질까, 1년쯤 전부터 그게 고민이었습니다.”
폐교된 경기 여주군 강천면 굴암리의 강천초교 강남분교 건물과 터를 새 단장해 쓰고 있는 여성생활사박물관(031-882-8100)에서 좀 묘한 전시회가 열린다. 8일 시작해 17일까지 이어지는 민화작가 전혜숙(40)씨의 ‘조선시대 명작 죽이기 여행-민화 노마드’ 특별전이다.
이름부터 도발적인 이 전시회에는 전씨의 전통 민화작품 30점과 함께 색다른 그림 9점이 선보인다. 조선후기 3대 풍속화가의 한 사람인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가 ‘마님도’로 변모하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가 ‘고작도(孤鵲圖)’나 ‘쌍작도(雙鵲圖)’로 바뀐다. “현재의 민화 화풍에 큰 영향을 끼친 조선시대 대가들의 작품을 그 시대의 다양한 사회구성원의 시각에서 창작자와는 전혀 다른 텍스트로 읽어 내려간” 결과물이다.
혜원의 원래 ‘미인도’가 유교사상에 입각한 정치 이념을 실현하고 도덕 규범을 확립하는 조선 지배계층의 정서를 십분 반영한 것이라면, 하인의 눈에 비친 마님의 모습을 표현한 전씨의 ‘미인+마님도’는 속곳 차림이거나 아예 옷고름을 풀어 헤친 모습이다. ‘마님도’는 이런 시각의 결정판이다.
갸날프면서도 고운 선, 다소곳한 옷 매무새의 사대부가 여성은 온데 간데 없고 펑퍼짐한 몸매에 빈약한 가슴을 내놓고 한 손에는 여유롭게 곰방대를 잡아 쥐었다. 만날 구박 받고 살아가는 힘없는 여종의 마님에 대한 이미지이다.
문인화의 최고 경지를 보여준다는 추사의 ‘세한도’는 제주도 유배 당시 추사의 심경을 담은 새로운 그림으로 탈바꿈한다. ‘내세에는 우리 부부 바꾸어 태어나서/ 나는 죽고 그대만 천리 밖에 살아 남아/ 그대에게 이 슬픔을 알게 하리’(來世夫婦易地爲/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有此心悲)처럼 애틋했던 부부애는 ‘세한도’ 원작 위에 석양의 붉은 노을과 앙상한 노송, 홀로 울고 있는 산까치 한 마리 그림 ‘고작도’로 표현되었다. 추사를 잘 아는 사람은 두 부부의 사랑을 ‘쌍작도’처럼 그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전통시대의 그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은 그 동안 소재나 작품 재료를 다양화하는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아직은 실험적이지만 사회적 약자의 시선으로 전통의 그림을 변형시키고 거기에 민화의 요소를 접목하는 것은 민화를 현대화하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전씨는 이 대목에서 ‘작가의 창작 행위는 기존의 텍스트를 재구성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롤랑 바르트의 예술론이 요즘 전씨에게 힘이 된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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