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면초가 삼성 대책은 뭘까
삼성그룹이 청와대와 여야 정치권은 물론 사법부 등 사방에서 옥죄는 ‘삼성 문제’ 해법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삼성은 법원이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 발행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린 지 하루가 지난 5일에도 “뾰족한 대책이 있겠느냐”며 켜켜이 쌓여가는 고민을 드러냈다.
막연한 국민정서와 달리 법원은 4일 CB 발행에 대해 “경영권 대물림을 위한 변칙 증여”라며 유죄 판결을 내려 치명타를 안겨 주었다. 이에 따라 이건희 회장의 검찰 소환과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에 대한 상속ㆍ증여세 부과설 등이 떠도는 심각한 위기 상황이지만, 삼성은 ‘어설픈 대응’은 오히려 ‘족쇄’가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말을 아끼고 있다.
일각에서는 “과거 일을 싸잡아 삼성 때리기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 억울하다”는 푸념도 들리지만, “소나기가 과연 언제 그칠까”에 대한 우려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삼성은 지배구조 등과 관련,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적 등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화답해야 할 의무감에 짓눌려 있다.
그러나 개개 사안에 대해 즉각적인 대응을 피하는 대신 ‘삼성공화국’ 논란을 무마할 수 있을 정도의 큰 틀에서 해법을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관계자는 “사법부와 행정부의 최종 판단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어정쩡하게 대응하면 야합설 등 또 다른 논란의 불씨만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CB 발행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오고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 등이 확정될 때까지 모든 시나리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겠지만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 삼성은 금산법 개정 문제와 관련, 삼성생명이 보유중인 삼성전자 지분 7.2%는 인정하되 삼성카드가 금산법 제정 이후 취득한 에버랜드 지분 25.64% 중 5% 초과분은 처분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청와대와 여당의 방침에 대해서도 뚜렷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여권의 방침은 삼성과 정부, 시민단체의 입장을 두루 고려한 절충점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정작 삼성은 “그게 아니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삼성카드의 에버랜드 지분 초과분인 20.64%를 처분해도 경영권 유지에는 별 영향이 없지만 매입할 곳도 마땅치 않고 지분 가치 평가에 따른 특혜 논란 등에 휘말릴 소지가 있다는 하소연이다.
그러나 속내를 파고 들면 그룹의 지주 회사격인 에버랜드 지분 구조에 ‘이물질’이 끼어들 경우 득 될 게 없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게 재계의 분석이다. 외부 시각과 달리 삼성 입장에서는 문제 하나 하나가 한결같이 난제인 셈이다.
일부에서는 또 삼성이 공화국 논란의 단초를 제공한 공정거래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철회하는 등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비판을 일부 수용할 것으로 점치고 있지만 삼성은 이 역시 “검토한 바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의 금융 계열사 의결권 제한에 따른 재산권 및 평등권 침해 등 위헌 여부에 대해 법리적으로 국가 기관의 판단을 받는 건 당연한 권리라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적대적 인수합병(M&A) 방지 등 기업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삼성은 하나를 양보하면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 여론의 향배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적절한 카드를 뽑아 들기 위해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이종수 기자 jslee@hk.co.kr
■ 에버랜드 CB 변칙증여… 윤종용 부회장 "법적 의무 없다”
5일 재정경제부에 대한 국회 재정경제위원회의 국정감사에서는 증인 출석요구를 받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불참한 가운데, 삼성차 부채처리와 한화그룹의 대한생명 헐값인수 의혹을 둘러싸고 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졌다.
“삼성이 채권단과 약속한대로 삼성차 부채를 떠안아야 한다”는 의원들의 주장에 대해, 증인으로 출석한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도석 삼성전자 사장 등은 “도의적 책임이 있을 뿐 법적으로 이행할 의무는 없다”고 반박했다.
이날 삼성에 대한 공격은 박영선 열린우리당 의원과 심상정 민노당 의원이 주도했다. 전날 금융산업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과 관련해서도 삼성을 거세게 몰아쳤던 박 의원은 “외환위기 직후 삼성은 ‘삼성차 손실 보전에 국민의 혈세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겠다’는 신문 광고까지 내고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의원은 “삼성전자 회계보고서에도 삼성차 손실보전 항목이 삼성이 책임져야 할 우발부채로 잡혀 있다”며 “삼성전자 등 삼성 계열사들이 삼성차 손실 보전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상정 의원도 “삼성차가 외환위기 이전 분식회계를 저지른 사실이 예금보험공사 감사에서 드러났다”며 “삼성은 채권단과 약속한 삼성차 손실 보전을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삼성전자 윤 부회장은 “외환위기 당시 이건희 회장은 법적으로 책임이 없었지만, 도의적인 차원에서 삼성생명 주식 400만주를 출연한 것일 뿐”이라며 “당시 채권단이 삼성 계열사에 대해 금융제재를 하겠다고 해서 불가피하게 채권단과 합의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 부회장은 “삼성생명 상장 여부와는 상관없이 삼성이 삼성차 손실을 떠안을 수 없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여건상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다른 계열사의 손실을 떠안는 것이 외환위기 당시에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공정거래위원회의 규제와 외국인 주주들의 감시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밝혔다.
이날 국감에서는 삼성차 문제와 함께 ▦한화그룹의 대생 헐값인수 의혹 ▦경제자유구역 개발과 관련한 특혜 의혹에 대해서도 의원들의 추궁이 이뤄졌는데, 삼성측 증인과 함께 김남구 한국금융지주 부회장과 박해춘 LG카드 사장, 최장봉 예보 사장 등 금융계 주요 인사들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조철환 기자 chcho@hk.co.kr
■ X파일· 2002대선자금·CB / 검찰-삼성 3중 戰線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변칙증여 사건 수사가 재개되면서 검찰과 삼성 간 ‘전선(戰線)’이 확대되는 형국이다. 안기부 도청테이프 ‘X파일’로 불거진 1997년 불법 대선자금 제공 의혹과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서 풀리지 않은 삼성 채권의 행방에 대해 이미 수사를 받고 있는 삼성으로선 최대의 위기다.
한 재벌그룹에 대해 3갈래의 수사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하지만 이것은 의도된 것이라기보다는 우발적이다. 97년 대선자금 부분은 옛 안기부 미림팀 녹음테이프를 7월 언론이 보도하면서 촉발됐다. 2002년 대선자금 부분은 무기명 채권 800억원 어치를 구입한 뒤 해외로 도피했던 삼성증권 전 직원 최모씨가 올 5월 자진 귀국하면서 수사가 재개됐다.
에버랜드 CB 변칙증여 수사는 참여연대가 고발한 이건희 회장 등 33명의 삼성 임원 가운데 먼저 기소된 허태학, 박노빈 에버랜드 전ㆍ현직 사장에 대해 법원이 유죄를 선고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재개된 것이다.
하지만 경위야 어떻든 검찰이 삼성에 치명타를 줄 수 있는 세 사건 수사를 동시에 진행함에 따라 이번에야 말로 검찰이 이건희 회장의 개입을 확인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경영권 세습이나 수백억 원대의 불법 정치자금 제공이 모두 이 회장의 지시 없이 가능했겠느냐는 ‘상식론’을 사실로 입증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에버랜드 CB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는 “향후 수사의 핵심은 이건희 회장 등 관련자들의 공모 여부”라며 적극적 수사의지를 나타냈다. 고발장 접수 후 3년 6개월 만에 공소시효 완성을 하루 앞두고 허겁지겁 허씨 등 2명만 기소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서울중앙지검 도청수사팀도 김인주 구조조정본부 사장, 이학수 부회장에 이어 홍석현 전 주미 대사 소환조사를 앞두고 있다.
2002년 삼성 채권의 행방도 대검 중수부가 현금화한 채권의 출처를 추적 중이어서 정치권 유입 정황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검찰이 이건희 회장을 보호하기 위한 삼성의 ‘꼬리 자르기식’ 방어를 깰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검찰이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사건(2000년), 삼성전자의 계열사 주식 헐값매각 고발사건(2004년), 삼성SDI 노동자 불법 위치추적 고소사건(2005년) 등에서 매번 삼성측을 무혐의 처리한 것도 이런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 마저 삼성 ‘떡값’을 받았다는 의혹으로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 강한 의지로 수사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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