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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29) 대전지방 노동청장 김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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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29) 대전지방 노동청장 김동회

입력
2005.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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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초등학교 시절 유난히도 만화읽기를 좋아했다.

수업시간에도 숨어서 만화를 봤고 선생님께 들켜 혼도 났지만 고쳐지질 않았다. 만화와 씨름하며 보낸 세월 덕분에 광천중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하고 말았다. 낙방생이라야 13명 뿐인데 거기에 포함되었으니 어린 심정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어렵사리 보결로 그 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열등감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다. 공부도 못하는 형편없는 놈이라 손가락질 하는 것만 같아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과 제대로 어울릴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도 기어코 이 참담함을 어떻게든 극복해보겠다고 앙다짐을 했다. ‘공부를 잘하자, 반드시 일등을 해내자.’ 이래서 교과서와 참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앉은뱅이 책상 앞에서 영어단어를 죽어라 암기하고 방정식에 매달리다 보면 밤샘하기가 일쑤였다. 코피가 터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상에 엎드려 졸다 보면 얼굴은 뚱뚱 부어 올랐다.

집에서 학교까지 10리를 걸어서 다녔는데 이 시간도 아까워 책을 읽었다. 얼마나 몰두하면서 다녔던지 전주에 부딪치기도 하고 길 한가운데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을 밟아 혼비백산을 하기도 했다.

덕분에 1학년 중간고사에서 상위권에 진입하게 되었고 기말고사에서는 끝내 1등을 해냈다. 그런데 1등이란 목표를 이룬 이후 시험을 위한 책읽기, 즉 학교 공부가 갑자기 시들해졌다.

그 때부터 난 학교의 도서관에 파묻혀 살았다. 광천 중학교는 광천상고와 한 울타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시골학교의 도서관 치고는 장서도 많았고 시설도 꽤 괜찮았다.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교과서보다는 도서관에 진열된 각종 책을 난삽하게 읽기 시작했다. 역사 지리 사회 철학 과학 고전 세계명작 등을 보이는대로 읽었다. 한번 잡으면 밤을 새는 것이 다반사였다. 결국은 도서관에 소장된 책의 색인표에는 내 이름이 대부분 등재되었다.

문제는 감수성 예민한 15~16세에 누구의 지도나 체계도 없이 마구잡이로 책을 읽다 보니 지식 소화불량에 걸려 동티가 났다. 정신적으로 너무나 조숙해버렸고, 끝내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아가 됐다. 다른

사람들이 유치해보여서 대화를 전혀 하지 않았으니 이걸 알아챈 선생님 한 분이 휴학을 권했다. 3학년 1학기때 일이다. 1년 후 복학은 했지만 끝내 정상적인 수업을 받지는 못하고 어렵게 졸업장만 받고, 상처로 얼룩진 꿈 많은 학창생활을 마감하였다.

이 무렵 우리 가정은 유난히 힘겨웠다. 5남매의 큰 형님이 오랜 질병으로 몸져누워 계셨고 나이 많으신 아버님이 농사를 지으시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셨다.

당장 가족의 호구책을 찾아 전쟁하듯이 보내는 형편이라 문제아로 치부된 막내에 대한 장래 문제는 관심 밖이었다. 난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세상과 유리되어 힘겹게 하루하루를 자신과 싸우며 아웃사이더이자 낭인처럼 지냈다.

이런 내가 딱했던지 친척 한 분이 밥이나 벌어먹게 해준다며 홍성의 철공소에 소개시켜 주었다. 그러나 거기도 적응이 안되어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역에서 생면부지의 아저씨를 만나 남대문시장에서 리어커로 야채 운반하는 일을 얼마간 하게 되었다. 이런 생활 역시 자기만의 정신세계를 이미 형성하고 있는 소년에게는 아무런 기회가 될 수 없었다.

난 다시 귀향하였고, 고향 근처의 암자에서 고시생들을 보게 되었다. 나도 시험을 치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가족 동의를 얻어 1년 정도의 기간을 한정으로 9급 공무원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열 여덟살때였다. 다시 시험공부에 모든 것을 걸었다. 내 스스로 생각해도 완전히 공부에 미쳐 갔다.

시험 수준이 최소한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요구하고 있어 중학교를 겨우 마친 내 수준으로는 참으로 암담함을 느꼈다. 다행인 것은 그 동안에 닥치는 대로 읽은 여러 책들의 이런저런 내용들이 많은 도움이 되곤 하였다.

공부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나에게 용기와 각오를 새롭게 하는 마음의 양식도 내가 어릴 적에 읽었던 수많은 위인전과 만화와 각종 책들의 내용이었다.

책을 너무 읽어서 버려진 사람으로 치부되었던 나이지만 책을 읽었기에 나를 다잡을 수가 있었다. 이러니 세상사가 어떻게 풀릴지는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독하게 공부에 매달렸다. 잠도 누워서 자질 않았고 밥도 책상에서 나 혼자서 먹었다.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반면 시험에 필요한 정보나 지식을 위해서라면 한밤중에 삼십리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하나의 길로 미쳐 버린 덕인지 1969년 내 나이 19세때에 공직에 입문하게 되었다.

처음 9급 말단으로 공직을 시작한 곳이 바로 내가 현재 근무하는 대전지방노동청의 전신인 노동청 대전직업안정소였다. 어렵게 공직에 진출은 했지만 처음 받은 월급으로 하숙비를 지급構?나니 최소한의 용돈도 되질 않았다.

말단의 신분을 벗어난다는 것도 요원해 보였다. 희망에 부풀어 시작한 직장생활이 초장부터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었고, 끝내는 자기 회의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

일단 흥미를 잃다보니 상사나 주변 동료들로부터 눈총을 받기 시작하였고, 자꾸 따돌림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별다른 대책 없이 4~5년 말단으로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예의 책읽기 병이 또 도져 당시 유행하던 무협지와 각종 추리 탐정소설과 문고판 읽는 재미로 그럭저럭 버티어 내고 있었다.

어느 날 상사한 분이 고맙게도 한마디 해 주시었다. “그렇게 헐렁하게 세월만 보내지 말고 젊었을 때 다부지게 일을 열심히 한 번 해봐라. 그리 되면 승진도 남보다 빨리 할 수 있고 일정한 직위에 도달하면 보수도 많아지고 사회적 명예도 얻을 수 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난 벼락을 맞는 기분이었다. 막연하게 스스로에 대한 문제인식을 하고 있는 때에 따뜻한 충고가 가슴을 친 것이다.

난 즉각 이 배움을 실천하기로 했다. 본연의 일에 충실하고 그 이외 알파를 추가한다면 나에게 드리워졌던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이 싫어하고, 귀찮게 여기고, 생색나지 않는 숨겨진 작은 일들을 찾아하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에서 방황할 때 밤새워 3회독을 하였던 일본 소설 ‘대망’에 등장하는 어느 무사의 독백이 힘이 됐다. “인간은 천길 절벽에 외줄을 잡고 떨어졌을지라도 그 외줄을 놓을 줄 아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 최선을 다하되 필요하다면 모든 패를 포기하고 원점에서 죽을 각오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살아오면서 내가 읽었던 책이, 공부가 그때마다 나를 일깨우고 힘을 불러 넣었다.

그 이후 승진은 동료보다는 약간씩은 빨랐다. 사무관(5급)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는 아무래도 학력이 마음에 걸렸다. 망설임 끝에 대학에 진학할 것을 결정하고,

32세에 대입자격 검정고시에 도전하였다. 당시 두 아이의 아버지이고 가장이었다. 고맙게도 아내는 내 뜻에 박수를 보내 주었다.

단과학원 야간반에 등록을 하고 낮에는 착실하게 일하고 밤에는 동료 모르게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기본 교과서를 손에서 놓은 지 대략 13년 만에 다시 잡았고, 결국 검정고시 시험 2회차에 전 과목 합격하였다.

대학 예비고사를 거쳐 34세에 국제대학 경제학과 야간반에 입학하였다. 등교에만 두시간 반이나 걸리는 고된 공부였지만 나는 어려운 줄 모르고 열심히 했다. 만학의 뿌듯함과 당당함이 세상을 다시 사는 느낌을 갖게 해 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그 해 사무관 내부 승진 시험에 응시하였다. 결과는 경제학 과목의 과락으로 낙방이었다. 경제학과를 다녔는데도 이러니 허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의에 빠진 나에게 직장 선배가 충고를 해주셨다. “엎어진 물동이 물을 아무리 아까워해도 다시 쓸어 담을 수는 없다. 빨리 잊고 새로 시작해라.” 이 순간 난 시험 실패를 아주 비싼 대가를 치른 공부로 받아들였다.

당연 합격이란 강박감과 나는 시험에 자신있다는 자만심 때문에 글자 한 자를 오독해서 틀렸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88년 사무관 시험에서는 최선을 다해도 떨어질 수 있다는 담담한 마음으로 응했고 결과는 수석합격이었다.

그 이후 나는 매사에 마음을 비운다는 자세로 최선을 다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더욱이 요즈음 중앙부처의 고위직은 엘리트 코스의 인재들로 채워졌고 이들과 경쟁을 통해 앞서간다는 것은 간단치가 않다.

그것이 가능했던 비결은 무작정 어떤 종류의 책이든 책이 좋아서 읽었고, 이것이 공부였고, 이 공부가 현장에서는 학습능력을 높이는 상승적 효과를 가져와 오늘의 나를 키워낸 것이다.

나는 고답적이고 심오하고 전문적인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 그저 좋아서, 필요해서 책을 보고 공부하고 학습할 뿐이다. 그래서 내면을 살찌우고, 사유하게 하고, 업무능력을 향상시켜 주기에 난 앞으로도 쉼없이 이렇게 공부를 할 것이다.

■ 김동회 청장은

김동회 대전지방노동청장은 고시를 통하지 않고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 청장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힌다. 195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죽림초등학교와 광천중학교가 공식 학력의 전부였던 그는 69년 노동청 대전직업안정소 행정서기보(9급)로 시작했지만 늘 공부하는 자세로 내부승진을 거듭했으며 5년 3개월만에 3급으로 승진했을 때는 너무 짧은 기간의 승진으로 행정부처 내에서도 화제가 됐다.

노동부에서 장애인고용과장 노사협력과장을 지냈으며 최저임금위원회 상임위원을 거쳐 올 7월에 대전지방노동청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독서와 더불어 주변에서 만난 이들의 자세로부터 큰 공부를 했다고 말한다.

서울기능대학장을 지낸 고 조남영씨는 ‘덕과 청렴함’을, 중앙노동위원장을 지낸 배무기씨는 ‘타인의 눈에 맞추어 대화와 업무 처리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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