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밉든 곱든 간에 우리들은 반생을 강아지처럼 살아왔다. 숭늉을 들고 온 아내의 손을 보면 옛날의 손이 아니다. 나도 작금년부터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다. 우리도 늙어가나 보다. … 여기까지 쓰고 아내에게 보였더니 퇴박을 맞았다. 왈, 범부의 담이라고. … 나는 생활에 있어서나 그림에 있어서나 아내의 비판을 정직하게 듣는다.” (김환기, ‘山妻記’중에서- 월간 신천지 1952년 3월호)
한국현대미술의 개척자인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1913-1974)와 그의 아내이자 예술적 동지이며 뮤즈였던 김향안(金鄕岸.본명 변동림ㆍ1916-2004)을 찾아 올라간 서울 종로구 부암동 언덕길은 가을 햇살아래 고즈넉했다.
환기미술관이 여기 저기 실렸던 두 사람의 글을 모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환기)와 ‘월하의 마음’(김향안)을 출판하면서 기념 전시회를 여는 자리. 1층 정면에는 쌍으로 된 수화의 대형작품 ‘유니버스’가 대각을 이뤄 높이 걸렸다. 무한히 확장하는 우주만큼이나 신비한 것이 삶과 예술, 그리고 인연이라고 웅변하는 듯한 자세다.
‘그림에 부치는 시(詩)’라는 부제를 단 전시에는 수화의 유화 40점과 김향안의 풍경과 정물화 10점, 수화가 창간호부터 맡아 그린 현대문학 지 31권의 표지화와 삽화, 드로잉 등 모두 150여점이 걸렸다. 벽면 곳곳에는 부부가 틈틈이 쓴 짧은 일기와 편지글이 새겨졌다. 그림과 글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공명하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두 걸출한 예술가의 내면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수화는 한국현대미술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 달항아리와 산, 매화 사슴 새를 단순하고 밝은 선으로 묘사한 초기 구상화부터 점과 선 만으로 생명을 노래한 50년대 파리와 뉴욕시대로 이어지는 추상화에 이르기까지 워낙 유명한 그림은 차치하고라도 글이 퍽 다감하다. 글에는 화가로서의 고뇌와 조국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도 엿보인다.
‘일을 하며 음악을 들으며 혼자서 간혹 울 때가 있다. 음악 문학 무용 연극- 모두 다 사람을 울리는데 미술은 그렇지가 않다. 울리는 미술은 못할 것인가.’(68년 1월26일) ‘나는 술을 마셔야 천재가 된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 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70년 1월27일)
김향안의 그림은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파랑 주황 등 선명한 색상을 이용해 몽환적으로 표현한 기법도 탁월하지만 30년을 함께 했으면서도 남편의 영향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개성적인 그림이라는 점이 놀랍다. 환기미술관 박미정 관장은 “팔순이 넘어서도 정신은 여전히 청년이었던 그 분의 단단한 자의식이 엿보인다”고 말했다.
김향안은 스물에 첫 남편이었던 시인 이상의 임종을 위해 12시간 기차를, 8시간 연락선을, 다시 24시간 기차를 타고 도쿄(東京)의 병원을 찾아갔던 당찬 여인이었다. 28세에는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수화를 만나 결혼했다. “내가 먼저 가 터를 닦은 뒤 부르겠다”며 1년 먼저 파리 유학을 감행한 이도 그였다. 국내 최초의 작고화가 기념관인 환기미술관도 수화 사후 18년에 걸친 김향안의 집념과 열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김향안의 수필집 말미에는 수화의 작고 20주기를 맞은 날의 짤막한 감회가 실렸다. “…고로와즈(수화가 즐겨 피운 담배) 피워놓고 꽃다발 놓고… 나는 햇볕이 뜨거워서 단풍나무 그늘 아래로 갔다. 20년이 흘렀다. 나도 쉬고 싶다.”
전시에는 수화가 쓰던 붓과 물감들, 도자 재털이, 검은 뿔테안경과 모자 등 유품들과 파리와 뉴욕시대의 흑백사진들도 전시됐다. 소박한 작업실에 앉은 키 크고 목이 긴 화가와 동그란 안경을 쓴 작고 당찬 여인의 모습은 문화와 예술에 심취했던 한 시대의 데카당스한 분위기를 전해준다.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헌신으로 평생을 바쳤던 두 걸출한 예술가의 삶. 전시는 가을 햇살만큼이나 명징하게 삶의 의미를 반추시킨다. 16일까지. (02)391-7701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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