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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잘못된 길 - 1990년대 이후의 급진적 여성 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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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잘못된 길 - 1990년대 이후의 급진적 여성 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

입력
2005.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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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폭력과 여성폭력은 이유·의미가 너무 달라 한국 사회에서 급진적 페미니즘은 잘못된 길이 아닌 아직 가지 않은 길이다"

2003년 8월, 프랑스 영화 ‘남과 여’의 배우 장 루이 트랭티냥과 페미니즘 영화 감독으로 유명한 나딘 사이에 난 딸 마리 트랭티냥이 애인에게 구타 당해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재능 있는 가수이자 배우였던 그녀는 동거중인 남자 친구의 수 차례에 걸친 주먹질로 머리가 깨져 사망, 프랑스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더구나 가해자가 인기 록 그룹 리드 싱어이자 사회적 이슈에 발언해 온 의식 있는 인물로 알려진 베르트랑 칸타여서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계층과 교육 정도에 상관없이 발생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형태의 폭력이다. 수많은 페미니즘 사상과 ‘정파’ 중에서 1970, 80년대 서구 사회를 풍미했던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가정 폭력과 성폭력을 집중적으로 사회 운동의 의제로 삼았다.

이들은 기존의 자유주의, 맑스주의 페미니즘이 가족, 성, 사랑 등 소위 사적 영역의 여성 억압을 다루는데 실패했다며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정면으로 비판한 책이 페미니스트 이론가에 의해 출판되었다. 프랑스의 저명 여성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잘못된 길 - 1990년대 이후의 급진적 여성 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문제작’일 수밖에 없는 책이다.

바댕테르는 “남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만들어진다”는 명제를 증명, 남성성에 관한 여성학의 고전으로 자리잡은 ‘남자의 여성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의 저자이자 지난 30여 년간 여성주의에 몸 담아왔다.

그녀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현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을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인식하며, ‘남성 지배’라는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매 맞는 남편’도 있고, 남성도 다이어트나 외모로 고통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여성도 폭력과 살인을 행사하며, 남성만큼 권력과 성적 일탈을 추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저자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남녀를 분리, 대립시켰다며 이러한 전략으로는 양성 평등을 이룰 수 없다고 본다. 여성 운동에도 불구하고 남녀 관계는 성숙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두 성 모두 상처 받았다는 것이다. 지금 여성은 목청 높여 큰 소리로, 남성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면서 서로 자신이 상대방 성의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 간 탈식민주의, 후기 구조주의 페미니스트 등 많은 사상가들이 성폭력, 성매매, 이성애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다며 남성 문화 자체를 성폭력 문화로 규정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이분법적 사유를 비판해 왔다. 문제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내용이다.

이 책은 저자가 ‘변절’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실망스럽다. 저자의 지적은 모두 현실의 일부이다. 여성도 폭력적이다. 그러나 이를 남성의 폭력과 질적, 양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여성과 남성이 폭력을 행사하는 이유와 의미, 구조는 너무나 다르다. 남편은 ‘내가 하라는대로 하라’고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만, 아내는 ‘더 이상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며 ‘폭력’을 행사한다. 남편이 아내를 때려 죽이면 ‘과실 치사’지만, 아내가 폭력 남편을 정당방위 차원에서 죽이면 ‘살인’이 된다. 남성의 폭력은 훨씬 허용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세계적 연대 속에 쉽게 자리 잡았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쉽게 받아 들여진 덕분에 아직도 강간과 가정 폭력이 그토록 횡행하는가? 5,000년의 가부장제가 그리 만만할까? 내가 생각하기에 특히, 한국 사회에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잘못된 길’이 아니라 ‘아직 가지 않은 길’이다.

이 책은 남녀 간의 성 차이, 차별, 폭력이 생물학적인 것이냐 사회 문화적인 것이냐 하는 오랜 논란을 다루고 있지만, (아마도 저자가 파악하지 못한) 페미니즘 사상의 발달은 이미 이러한 이분법을 뛰어넘었고 이 진부한 논쟁을 ‘해결’하였다.

남성과 여성 모두 가부장제를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구조에 대한 적응만이 아니라, 개인의 행위와 추구들로 구성된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피해자 논쟁’을 떠나 양성평등을 추구하고 있다.

정희진 서강대 강사ㆍ여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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