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 호가 표류하고 있다. 경제전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등 EU 주축 국가에서 변화의 방향과 속도에 대한 여론이 갈리면서 EU 헌법과 경제 개혁 등 ‘하나의 유럽’을 향한 EU의 정치 일정이 차질을 빚고 있다고 지적했다. 변화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막상 변화가 이뤄지면 혹시 자신이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하는 유럽인들의 두려움이 유럽 통합의 항해 길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이 대표적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가장 높은 실업률로 고통 받던 독일 유권자 4명 중 3명은 이달 중순 치러진 총선 전만 해도‘개혁만이 위기 해결책’이라면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사민당 대신 앙겔라 메르켈 당수의 기민-기사련이 독일 개혁을 이끌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런 분위기를 읽은 메르켈 당수는 강도 높은 개혁 과제들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그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며 고용주의 건강ㆍ연금보험 부담율을 낮추고 20인 미만의 작은 기업도 해고를 자유롭게 하겠다고 나섰다. 또 메르켈이 차기 재무장관으로 내정한 파울 키르히호프 교수는“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25%의 소득세를 일률 과세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거들었다.
그러나 메르켈의 급진적 개혁론은 역효과를 불렀다. 유권자들 사이에 메르켈이 집권하면 독일식 사회보장 제도와 화합적 노사관계의 뿌리를 흔드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커지기 시작했고 슈뢰더는 개혁 속도 조절론으로 떠난 유권자들의 막판 표심을 붙잡아 완패를 면했다.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IHT)은 5, 6월 EU헌법 비준을 거부한 프랑스와 네덜란드도 변화를 앞두고 갈팡질팡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분석했다. 유럽의 장밋빛 미래를 위해서 미국식 자유시장주의 모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데 공감하면서도 EU가 하나의 시장으로 묶일 경우 동유럽의 값싼 노동력이 밀려와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 나라 국민들의 위기감이 EU 헌법 비준을 거부한 결과로 이어졌다고 이 신문은 지적했다.
IHT는 “특히 독일과 프랑스가 EU 추진을 주도했던 만큼 두 나라의 혼란은 EU 전체에 큰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현재로서는 삐걱거리는 배를 고칠 뚜렷한 대책도 없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불안한 미래보다 편안한 지난 날을 떠올리는 유럽인이 갈수록 늘고 있다”며 “유권자의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이 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고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총선 이후 다른 EU 나라는 당분간 개혁 추진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며 “강력한 자유시장주의 정책 추진으로 2006년 총선과 2007년 대선 승리를 노리는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쿠니 총리나 프랑스 내무장관 니콜라 사르코지도 개혁에 대한 유권자의 거부감을 의식, 급진적 개혁 추진을 망설이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FT는 다음달 예정된 EU 정상회의를 계기로 EU는 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독일, 프랑스 중심의 EU 추진에 불만을 느껴 온 국가들이 EU추진 시간표를 수정해야 한다거나, EU의 미래에 가장 적합한 사회모델이 어떤 것인지를 재검토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설 것으로 예상되면서 EU호가 출발선으로 되돌아 갈 지 모른다는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박상준 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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