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총수들의 잇단 국정감사 증인 채택과 세무조사 등의 악재 앞에 재계의 고민과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등 재벌 총수가 줄줄이 국감에 나서야 할 형편인데도 재계를 대변해 온 전국경제인연합회등 경제단체는 일부 회장들의 구설수로 발이 묶여 제대로 된 목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삼성은 노무현 대통령이 지배구조 등을 겨냥해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데 이어 이건희 회장이 국회 재경위 국감 증인으로 채택된 지 하루가 지난 28일에도 “당혹스럽지만 특별한 입장은 없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압박하고 국회도 “성역은 없다”며 ‘반응’을 기다리고 있지만 삼성은 풀기 어려운 숙제 앞에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만 증인 채택과 관련, 이 회장은 불참하되 삼성전자의 윤종용 부회장과 최도석 사장은 출석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은 폐암 치료를 위해 미국에 머물고 있는 이 회장의 경우 ‘정당한 사유를 설명하면 출석을 거부할 수 있다’는 판례로 볼 때 신병 치료는 불참 사유에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윤 부회장 등은 이유 여하를 떠나 불참하면 ‘역시 삼성공화국’이라는 비난 여론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아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삼성은 또 증인 채택 사유인 ‘삼성자동차 손실보전 문제’와 관련, 노 대통령의 전날 발언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선처를 구하는 모습이었다. 노 대통령은 “삼성 자동차 부채에 대해 계열사와 사주가 돈을 물어내라는 소리를 듣고 상법을 공부한 나는 한참 갸우뚱 했다. 주식회사 유한책임제도 자체가 그런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거 아니냐”며 삼성과 이 회장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대한생명 인수과정의 로비 의혹과 관련, 김 회장이 증인으로 채택된 한화는 “지난해 국감에서 다 밝히고 검찰 수사도 마친 해묵은 사안을 문제 삼아 또다시 총수를 부르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난감해 하고 있다. ‘형제의 난’으로 박용성 회장과 박용호 전 회장이 나란히 증인으로 채택된 두산그룹은 비난의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심정으로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기면 재계 곳곳에서 “경제 살리기에 전념해야 할 기업인들을 불러 욕을 보여 얻을게 무엇이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주요 정책 등 국정 전반을 감사해야 할 국감 무대가 정부에 대한 견제보다 삼성으로 대표되는 기업 때리기와 무책임한 폭로 및 막말로 얼룩지고 있다는 비난은 꽤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또 정계 개편 등을 앞두고 벌어지는 여야 정치권의 선명성 경쟁에 기업이 ‘새우등 터지는 꼴’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일부 정치권 및 시민단체의 발언은 기업 활동을 저해하고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좌파적 발상에서 비롯됐다”며 “대기업에 대한 세무조사와 함께 기업의 기를 죽이는 상황에서 누가 투자에 적극 나서겠냐”고 지적했다.
이종수기자 jslee@hk.co.kr
황양준기자 naig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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