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에게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수첩공주’로 통한다고 한다. 수첩에 써준 것을 보지 않으면 이야기를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박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수첩을 보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폄으로써 이 이미지를 상당히 불식시켰다.
그리고 추석 직전 박 대표를 초청한 방송기자 토론회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정부의 부동산 보유세 인상을 비판하다가 오버를 해 실수를 했지만 전체적으로 수첩 없이도 기자들의 질문에 잘 답하는 모습을 보고 박 대표를 다시 보게 됐다.
그러나 이처럼 진일보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박 대표는 아킬레스건인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 충격적일 정도로 수구적인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실망감을 줬다.
즉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를 5ㆍ16군사정권이 쿠데타 후 김기태 씨로부터 강제로 빼앗았다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 결과와 관련해, 사실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이 같은 주장을 계속할 경우 법적 조처를 취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정수장학회 어설픈 변명
문제는 이 같이 예민하고 자신이 관련된 문제에 대해 박 대표가 사실 관계와 조사 결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설픈 자기변명만 하고 나선 것이다.
구체적으로, 박 대표는 군부가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한 김씨로부터 “장학회를 기증받은 날짜를 허위 기재했다고 하는데 정수장학회는 정확히 기증받은 날짜가 적힌 원본을 갖고 있으며 당시 관계된 사람들이 강탈이 아니라고 증언을 하는데도 강탈이라고 우기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문제는 필자가 학계 대표로 위원회에 참가해 직접 조사에 관련했던 만큼 잘 알고 있는 사안으로 말이 되지 않는 변명이다. 우선 정수장학회가 가지고 있는 원본은 김지태의 기증날짜를 변조하지 않았다는 박 대표의 말은 맞다.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원본의 기증 날짜는 김지태씨가 감옥에 갇혀있던 날짜로 기증이 자의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이다. 그리고 군부는 이 같은 사실이 후에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청에 사본을 제출할 때는 김씨가 포기각서를 써주고 석방된 이후로 기증 날짜를 변조해 제출한 것이다.
관계자들의 증언도 마찬가지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핵심 관계자는 이 문제가 사회적 문제가 되기 전 직접 쓴 글에서 김지태 구속수사는 박정희의 특별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런데 이 문제가 터지자 김지태 구속 직전 부산을 내려온 박정희를 만난 것은 사실이나 박정희는 포괄적으로 알아보라고 했을 뿐 그간의 내사자료에 의해 구속한 것으로 김씨의 구속 수사가 부산일보 등 그의 언론사와 장학회를 빼앗기 위한 표적 수사는 아니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가 박정희를 만나기 직전에 직접 작성해 올린 보고서는 김씨에 대해 국가관이 투철한 인물이라는 등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있을 뿐 비리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다.
현실이 이러하거늘, 관련자들이 강탈이 아니라고 증언하는데도 강탈이라고 우긴다니, 강도가 자신이 한 짓이 강도가 아니라고 증언하면 강도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인가? 기이한 박근혜식 논리이다.
●조사결과 승복하고 털어야
사실 군부가 정수장학회를 빼앗을 당시 박 대표는 열 살도 안됐을 터인데 그 과정을 어찌 알 것인가? 또 박 대표야 부친으로부터 장학회를 물려받았을 뿐 정수장학회의 강탈행위와는 무관하다. 따라서 박 대표가 더욱 큰 정치인으로 크기 위해서는 국정원의 조사결과에 승복하고 장학회를 사회적 공론에 맡기겠다는 전향적인 자세로 과거사 문제를 털고 가야 한다.
그것이 아니고 이처럼 수구적 태도를 보이며 이 보 후퇴, 아니 열 보 후퇴를 해서는 수첩공주를 벗어나 일 보 전진을 해도, 박 대표에게 별 미래가 없다. 일 보 전진하고 열 보 후퇴하기, 안타깝지만 박 대표의 요즈음 모습이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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