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평론가 고길섶씨의 ‘스물한 통의 역사 진정서’는 언어의 풍경을 통해 광복 직후부터 1970년대까지의 우리 현대사를 되짚어본 책이다.
저자는 한국 현대사를 말의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의 역사로 그려내면서 해방 이후 근대 민족 언어의 형성 과정을 살펴본다. 저자는 책에서 언어권력의 이중성을 파헤치고 특히 언어가 ‘국어’라는 편협한 범주로 축소되는 과정, 그리고 권력화되는 양태들을 살폈다.
저자에 따르면 반공이데올로기의 정착, 독재정치와 폭압적인 노동통제는 모두 언어의 힘을 빌려서 가능했다. 해방 공간의 ‘삐라’는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정당들의 다툼의 최전선에 있었고, 신탁통치 파동의 물길은 당시 언론의 왜곡 보도가 끌고 나갔다. 전태일은 ‘축조 근로기준법 해설’이라는 책에서 새로운 언어와 세상을 발견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언어의 탄생 뒤에는 적잖은 갈등이 숨어 있다. 한글전용론자(한글파)와 국한문혼용론자(한자파)의 대립, 해방 공간의 문맹퇴치운동, 국어순화운동 이데올로기는 모두 그런 갈등의 결과물이다.
반세기 동안 진행된 이 대립과 멍에 속에서 언어 선택의 자유는 상시 억압됐고, 마침내 자기검열 기제로 작동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여성 3인칭 대명사(그녀) 논쟁 이후 근대의 여성상이 만들어졌다든가, 정치와 일상을 흐르는 유행어를 되짚어 보는 등 재미와 현장감을 곁들였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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