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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명장 선정된 주용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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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명장 선정된 주용부씨

입력
2005.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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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은 사람 같아야 하고, 사람은 칼 같아야 하지요.”

22일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용호공업사 작업장. 51년간 칼 만들기 외길을 걸어온 주용부(65) 대표는 칼날에 붙은 쇳가루를 털어내며 칼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칼은 담금질을 할수록 단단해지고 녹도 덜 슬어요. 담금질이 잘 된 칼은 겉이 녹슬어도 속은 하얗지요. 시련을 잘 견뎌낸 사람과 닮았습니다.”

연마기로 갈던 칼을 들어 벼린 칼날을 살펴볼 때는 예리한 장인의 눈매이다. 하지만 작업장을 나서자 금세 그 나이의 인자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칼날이 제대로 서면 회를 떴을 때 피도 안 나잖아요. 공을 들인 만큼 칼날은 보답을 합니다.”

그는 지난 20일 노동부와 산업인력공단이 발표한 단조 분야 ‘명장’에 선정됐다. 반 백 년 동안 고집스럽게 전통 칼 제작 방식을 고수해 온 노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1986년 명장 제도가 도입된 이래 담금질과 망치질을 통해 칼이나 낫, 호미 등을 만드는 단조 부문에서 명장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칼 만드는 기술 하나로 나라의 인정을 받았으니 평생의 소원을 이뤘습니다.”

주씨가 칼과 인연을 맺은 것은 한국전쟁 때. 충북도립병원 의사였던 아버지가 실종되면서 14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남동생 하나, 여동생 셋 이렇게 남은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했다.

농사는 싫고 한약방 보조원도 내키지 않았다. 우연히 “대장일 하면 돈을 잘 번다”는 말을 듣고 고향 청주에서 망치를 잡았다. 키가 작다고 구박을 받기 일쑤였지만 3개월 만에 기술을 익혀 ‘대장장이 천재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 서울에 올라와 미군 부대에서 나온 고철과 철조망 등을 녹여 칼을 만들었다. 싸구려 칼에 밀려 고생도 했지만 평생 쓸 수 있는 좋은 칼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버텨냈다.

“서울서 아내(김광자ㆍ64)를 만났는데 한참 뒤에야 대장장이 집안 딸인 걸 알았어요. 그 동안 아내 도움이 컸지요.”

끼니를 잇기 위해 망치를 들었지만 남다른 호기심과 연구정신은 그를 진정한 장인의 길로 이끌었다. “옛날 대장장이들이 끝이 닳아 없어진 호미에 다른 쇠붙이를 붙여 쓰던 것에서 힌트를 얻어‘복합강’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강철과 스테인레스를 붙이는 방식인데, 칼을 갈았을 때 강철에 비해 연질의 스테인레스가 더 많이 갈려 통강철로 만든 칼처럼 층이 나지 않고 항상 날카로운 면을 유지시킬 수 있지요.”

그는 칼 끝을 붕어 머리 모양으로 둥글게 만든 안전 칼을 개발하는 등 칼, 주방용 기구와 관련해 얻은 특허, 의장등록, 실용신안이 30여 건이나 된다.

지금도 수작업으로 하루 평균 서너 자루를 만든다. 1,000번 이상의 담금질과 연마작업을 거쳐 나온 칼의 가격은 35만 원선(회칼 기준). 일류 호텔 주방장들의 주문이 끊이질 않는다. 다행히 큰 아들 영식(45)씨와 둘째 아들 영민(39)씨가 가업을 잇고 있다.

조리학과가 개설된 대학과 고교에서 강의도 한다. 학생들에게는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반값에 칼을 공급한다. 좋은 칼을 만나야 요리가 더욱 빛을 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칼 축제가 열리고 장인이 인정을 받는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전통 제작 기법이 한물 간 방식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험하고 힘든 일이지만 대를 잇는 명품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가업을 이어가게 해야지요.”

고양=김명수기자 lec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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