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씨의 장편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생각의나무 발행)는 ‘굶주림’에 대한 소설이다. 생명에의, 삶의 의미와 가치에의 굶주림이다. 그는 81학번 가난한 소설가 ‘영빈’을 내세워, ‘그’가(또는 그들 세대가) 겪어온 그 굶주림의 연원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영빈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 제주도로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에게 ‘호랑이’는 어떤 국면에 불쑥 나타나 어렵사리 지탱해온 삶의 리듬을 헝클어뜨리는 존재다. 방황하는 자의 막연한 불안감이거나, 근거 없는 자책감, 대상 없는 분노나 살의, 아니면 삶 자체에 대한 굶주림의 상징, 곧 자신의 환영이다.
그는 세상과 조화하지 못해 직장에서 떨려 났고 연인에게서 버림받는다. 하지만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형의 죽음이다. ‘시대의 짐’을 모질게 외면한 채 가계를 일으키고자 아등바등해보지만 학내 프락치라는 누명에 짓눌려 “비록 결백했으나 수치심에 나는 졌다”(232쪽)는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한 두 살 위의 장남. 대학시절 영빈은 그 누명의 방조자였다.
그에게는 ‘해연’이 있다. 둘은 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현장에서 택시 합승 승객의 인연으로 만났고, 9년 만에 이웃으로 해후한 사이다.
그녀 역시 어린 날 엄마의 외도와 별거, 아버지의 방황과 사고사라는 상처를 품고 산다. 둘 사이에 피의 정체성 등에 연루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고통 받는 재일교포 3세의 두 여자가 얽혀 들며 다단한 사연과 갈등들로 확장해나간다.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최대한 몸을 웅크려 타자와의 접면을 최소화하는, 이를테면 ‘가자미’같은 삶이다. “밝음과 어두움이 뚜렷이 공존하고 카멜레온처럼 여러가지 보호색을 띠고 있다고 하더군요.… 어두운 해저에 서식하고 있고요.”(133쪽) 빛이 없는 ‘해저’는 죽음의 공간이다.
“현실에 속해 있긴 하지만 머물 곳을 찾지 못하는 자들의 불안함. 또한 고립감과 분열감”(343쪽)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부상(浮上)하고 유영해야 한다.
제주에서 영빈은 끊임없이 바다로 나가 낚시를 한다. 그에게 바다는 치유의 공간이며, 낚시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확인하는 고행의 수단이다. “어느 때부턴가 나는 물때의 변화에 따라 내 몸이 리듬을 타고 움직인다는 걸 깨달았어. 나 역시 태양과 달의 리듬에 흡수돼버린 거지.
물이 살아나기 시작하면 내 몸도 달처럼 부풀어오르는 걸 느껴.… 그러다 간조 때가 되면 밖으로 드러난 심연을 목도하곤 하지. 간조의 바다는 외롭더군. 하지만 그조차도 리듬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장엄해 보이지.”(363쪽)
바닷가 응회암지대에서 발굴된 구석기인의 발자국 화석에 자신의 발을 맞춰보며 “영원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기분”을, “존재가 시작된 최초의 지점,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지점”(81쪽)을 엿본듯한 느낌에 매료됐던 그다.
새로운 시작은 간조의 바다에서 느낀 리듬의 장엄함과 다르지 않다. 모든 시작은 죽음과 같은 단절을 통해 성립한다.
62년생 호랑이띠인 작가는 2년여 전 훌쩍 제주도로 짐 싸서 떠났다가 얼마 전 경기 일산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이 소설을 냈고, 작가의 말에 “물 위를 맨발로 걸어온 느낌“이라고 썼다. 90년 등단한 이래 삶의 ‘매혹과 환멸’ 사이를 방황하며 끈질기게 그 시원을 찾아 헤매게 했던 그의 ‘호랑이’는 참으로 지독한 놈이었던가 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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