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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29> 김기택의 '태아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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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29> 김기택의 '태아의 잠'

입력
2005.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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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48)의 첫 시집 ‘태아의 잠’(1991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어느 문을 거쳐야 할지 모르겠다. 일급 조각가의 손을 거친 듯 잘 깎여진 언어로 구축된 이 시의 성(城)에는 사방으로 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유동성 지향. 이 유동성이라는 말에서 화폐금융론적 상상력을 이끌어낼 필요는 없다.

‘태아의 잠’이 유동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그저, 물처럼 흘러 움직이는 상태를 이 시집의 화자나 그 정서적 대리인들이 편안하게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이 양수(羊水)든 아이스크림이든 골(腦髓)이든, ‘태아의 잠’의 페르소나들은 유체의 상태를 희구한다. 그들에게 액체의 유연함과 물컹물컹함은 평화이자 자유다.

“그녀의 배 위에 귀를 대고 누우면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작은 숨소리 사이로 흐르는 고요한 움직임이 들린다 따뜻한 실핏줄마다 그것들은 찰랑거린다(‘태아의 잠 1’).

이런 유체 지향성은 석회 동굴 안의 딱딱한 돌고드름을 보며 그것들이 흘러 다녔을 먼 옛날을 아름다움의 상상으로 치장하는 ‘종유석’의 화자에게도 또렷하고, 제법 쌓인 연륜으로 “계란처럼 딱딱하게 익을 흰 골”과 “깨져도 여전히 둥글둥글하고 튼튼한 생각” 속에서 나올 “잘 생긴 말들”에 대해 안도하면서도 결국은 그 말들에서 “아무 냄새도 맡지 못하게 될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서른 살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의 화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성숙’의 징표이기도 할 딱딱함을, 그 단단함과 튼튼함을 이 시집의 서정적 자아들을 꺼린다.

“언제고 깨질 것 같은 너를 보면/ 약하다는 것이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유리에게’)거나, “느닷없이 팽팽해지는 식도 속의 진공 상태/(...)/ 울음을 토, 딸꾹, 막토막 잘, 딸꾹, 라내는 소리”(‘딸꾹질’), 또 “울음은 뜨거워지기만 할 뿐/ 눈물이 되어 나올 줄 모른다”(‘가뭄’) 같은 시행에서도 굳어진 것, 멍울선 것에서 벗어나 자늑자늑한 흐름의 상태로 향하고픈 시인의 희원이 읽힌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숨탄것의 첫 보금자리가 물이라는 상식을 믿는다면, ‘태아의 잠’의 이런 유체 지향에서 시원(始原)으로의 회귀 욕망을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서정적 자아들이 갈망하는 유체성과, 그 갈망을 실어 나르는 언어의 견고함 사이의 미적 긴장을 체험하는 것이 ‘태아의 잠’을 읽는 재미 가운데 하나다.

‘태아의 잠’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문은 동물이다. 이 시집의 제1부에 묶인 시들은 (모기나 바퀴벌레나 송충이까지를 포함한)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기실 동물 이미지의 빼어난 형상화는 이후 시집들에도 이어지는 김기택 시 세계의 특장이기도 하다. 동물들의 생태를 묘사하는 시들은 그 됨됨이 자체로 김기택 언어의 견고함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독자들로 하여금, 시인의 눈길에 실린 그 직관적 통찰에 힘입어, 문득 그 동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의 조건을 떠올리게도 한다. 어쩌면 그것을 시인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동물 시편들의 상당수가 ‘위장(胃腸)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은 심상찮다.

“어둠은 편안하고 안전하지만 굶주림이 있는 곳”이어서 “몽둥이와 덫이 있는 대낮을 지나/ 번득이는 눈과 의심 많은 귀를 지나/ 주린 위장을 끌어당기는 냄새를 향하여” “공기를 밟듯 나아가”(‘쥐’)는 쥐의 걸음을 보여줄 때, “먹을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채자 즉시/ 초점에서 내 얼굴을 지우”(‘개’)는 개를 보여줄 때, 호랑이의 “졸린 눈에서 광채를 발산시키”는 것이 “텅 빈 위장”(‘호랑이’)이라고 말할 때, 시인은 자신이 묘사한 동물들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과 동시에 인간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문제란 “엄청난 식욕”(‘모기’)의 문제다.

제2부의 한 시에서 아이러니의 맥락에 얹혀 발설되듯,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은 없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은 ‘밥 먹는 일’”(‘밥 먹는 일’)인 것이다. 먹잇감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비애를 환기시키는 ‘닭’이나 ‘마장동 도축장에서’ 같은 작품도 결국 이 위장의 문제에 줄을 대고 있다. “똥오줌 위에 흘린 정액을 밟고 들어가면/ 슬픈 눈동자들은 곧 음식이 되어 나온다”(‘마장동 도축장에서’).

동물들의 (인위적) 생태에 대한 이런 집요한 묘사는, 그 살과 가죽의 상상력을 통해, 이 시집의 세 번째 문이라 할 ‘살아있는 존재의 물질성’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진다.

모든 숨탄것이 벗어날 수 없는 이 물질성은 “흰 깃털들이 뽑혀져나간 붉은 피가 쏟아져나간/ 닭의 체온은 놀랍게도 따뜻하다”(‘닭’)에서처럼 어기차기도 하지만, “네? 누가요? 뺑, 소, 니, 차, 에, 치, 어, 어떻게 됐다구요? 당, 신, 의, 아, 들, 이, 대체 무슨 얘기죠? 죽, 었....(......) 당신의 자궁에서 꺼낸 것이 얼굴이 아니라 해골이었다는 것을, 다섯 살이 아니라 용수철 장난감 같은 갈비뼈였다는 것을 알게 될 시간”(‘목격자’)에서처럼 허망하기도 하다.

교통사고로든 자연재해로든 완전히 뭉개지고 바스러져 버린 시신을 볼 때, 우리는 인간의 몸뚱어리가 얼마나 가녀리고 푸슬푸슬한 것인지를, 70년 안팎의 세월동안 그것을 고스란히 유지해 죽음을 맞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를 문득 깨닫는다. ‘태아의 잠’의 몇몇 시들은 인간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몸의 존재라는 것을,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섬뜩하게 태연한 목소리로 환기시킨다.

‘태아의 잠’의 네 번째 문에는 일상의 집요함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연탄 가스를 적당히 마시면 1, 2’나 ‘8시’ 같은 작품에 드러나는 일상의 강박은 시인 자신의 것이기도 하겠지만, 규율사회의 조직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다수 동시대인의 것이기도 할 터이다.

“연탄 가스를 적당히 마시면/ 깨어 있어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다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시계의 조급한 초침 소리를 의식하게 되면/ 죽음보다 출근이 더 걱정된다고 한다”(‘연탄 가스를 적당히 마시면 1’). 일상의 시간표는 가위눌림의 두터운 갑각(甲殼)까지 뚫고 들어오는 것이다. “7시는 8시를 위하여 언제나 불안하”고, “7시가 되기 전까지 6시는 수백 번이나 아직은 7시가 아니라고 외친다”(‘8시').

아마도 이런 위장의 문제나 시간표의 강박이, 물질성의 자각과 버무려져, 이 시집의 마지막 문이라 할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태아의 잠’에서, 약한 것은 더러 노인으로 표상된다.

그 노인은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꼽추’)거나, “속도 속에는 없는 무진장한 시간을 한없이 밟으며 좁은 산길을 향해 느릿느릿”(‘노인’) 걷는다.

이 두 번째 노인의 이미지는 왠지 소를 닮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 느낌은, 시집의 다른 화자가 “예수는 크고 순한 눈을 소처럼 들어/ 피를 모아 노려보는 눈초리들을 받아들였다”(‘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고 말하는 것을 듣는 순간, 한결 실팍해진다.

‘태아의 잠’에도 꼬리를 잃어 파리 한 마리 못 쫓는 소가 엉덩이를 움직여대는 모습을 묘사한 ‘소’가 실려 있지만, 시인은 그 뒤에도 소에 관한 시를 더러 썼고, 올해 초에 낸 네 번째 시집은 아예 ‘소’를 표제로 삼았다.

이 시들에서 소는 참혹한 칼질의 대상인 살덩이이거나 제 말을 몸 밖으로 내보낼 줄 모르는 무력한 존재다. 바로 이 선한 무력함에서 시인은 어떤 거룩함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약한 것들에 대한 시인의 연민이 강한 것들에 대한 미움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연대감으로, 소속감으로 확산한다. 시집 뒷표지에 쓴 산문에서 시인은 “공기 속에 가득한 이 먼지들은 무엇인가? 한때 땅 위에 살았던 사람들과 동식물들의 풍화된 모습이 아닌가?

같은 시대에 살았다면 사랑했을지도 모를, 얘기하고 만지고, 그 눈동자만 생각해도 온몸에 열이 나고 떨렸을 어떤 아름다운 몸을 내가 지금 마시고 있지 않은가?”라고 쓰고 있다.

그랬구나! ‘태아의 잠’ 속으로 들어가는 문은 내가 지금껏 만지작거린 이런저런 문들이 아니었구나. 그 문은, 오직 하나 있는 그 문은, 시인 자신의 의식까지를 생태계의 거대한 순환 속에 배치하는 성숙한 관점이었구나! 먹고 먹힘이 적나라하게 묘사되는 동물 시편들에서까지 시인의 목소리가 그리도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깨달음 때문이었구나.

이 첫 시집을 냈을 때, 김기택은 이미 서른네 살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굳지 않았다. ‘서른 살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그가 꺼림칙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 송충이

아삭아삭 빛이 부서지는 소리

송충이가 솔잎을 갉아먹는다

나뭇가지인 줄 알고 송진이

송충이 혈관을 지나간다

부서진 빛이 송충이 내장 속에서

퍼진다 꿈틀거리며 간다

솔잎인 줄 알고 송충이 털 속으로

수액이 송충이 털 속으로 들어간다

선인장 가시처럼 뿌리내린

푸른 빛 속에 뿌리내린 송충이 털

내장인 줄도 모르고 섬유질 속으로

꽃인 줄 알고 털 끝으로 희고 가는 선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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