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추석 연휴 전날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귀향 메시지’를 발표, "추석 대목이 없다" '추석상 차리기가 너무 빠듯하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한없이 무겁다”며 “많이 힘들겠지만 모든 역량을 집중해 경제회복에 힘쓰고 있으니 희망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또 “물가와 부동산 만큼은 반드시 안정시키겠으니, 이런저런 걱정을 잠시 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서너 문장의 이 인사말이 문득 떠오른 것은 노 대통령이 얼마전 멕시코행 기내에서 기자들에게 한 ‘싱거운 소리’ 때문이다. “배웅나온 참모들에게 ‘대한민국에 큰 걱정거리는 없지만 걱정거리가 두개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태풍이고 다른 하나는 대통령인데, 그 대통령이 비행기를 타고 나가니 열흘은 조용할 것이고, 태풍만 잘 막으라고 했다. (참모들도) 그 말이 맞다는 분위기더라.” 외국 순방 일정으로 올해는 국민들에게 추석인사를 제대로 못하니 조크로 대신하겠다는 뜻이었으리라.
우연찮게도 두 일 사이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백성의 걱정과 어려움을 돌보는 대통령의 충정이다. 차이점도 있다. 1년 전엔 경제를 살려 근심을 덜어주겠다는 것이었다면, 이번엔 걱정거리인 자신이 자리를 비켜주겠다는 것이다. 이 말이 연정론 정국에서 제기된 ‘못해먹겠다-내놓겠다-물러나겠다’ 시리즈와 맥을 같이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통령의 의도와 관계없이 결과론적으로 음미할 만한 현상은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 불과 며칠 동안이지만 우리 사회의 목소리가 확연히 낮아졌다. 노 대통령이 연정론을 일단 거둔 때문인지, 명절 분위기 덕분인지는 몰라도 사회 전반적으로 말수가 적어지고 표현이 유순해진 느낌이다. 두달여에 걸쳐 격정적으로, 엄청난 양의 말과 글을 쏟아냈던 대통령의 ‘공백’이 주는 편안함을 모두가 즐긴다.
역사 진정성 필생 소명 갈등 반목 통합 기득권 불패 전쟁 등의 단어가 들어가는 얘기를 할 때는 누구든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지고 피도 뜨거워진다. 상생 공존 연대 타협 등의 좋은 얘기도 담론의 성격상 차분하게 접근하기 어렵다. 그럴수록 의제를 제기하고 풀어나가는 방식은 조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게릴라전 하듯 의제의 초점을 옮겨다니며 요란스럽게 일을 진행해온 탓에 국민들도 어느새 일단 고함부터 쳐야한다는 강박관념과 소음 스트레스에 스스로를 가둬왔다.
경제문제도 마찬가지다. 물론 ‘성장과 분배 모두 실패한 낙제점’이라는 일부 전문가와 언론의 중간평가도 옳은 것은 아니다. 과거정부에서 물려받은 부정적 유산과 양극화 심화라는 세계적 추세를 극복하며 단기간에 국민들 피부에 와 닿는 가시적 성과를 내는 것은 결코 쉽지않은 일이다.
더구나 성장과 분배의 패러다임이 급변해 경기가 호전된다고 서민들 살림살이가 금방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집권층은 양극화 덫에 걸린 우리 경제의 현실을 차근차근 설명하며 서민층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기보다 ‘그들만의 지표’만 소리높여 읊는다. 급기야 ‘민생경제를 위한 초당적 거국내각’을 하자고 목청을 키우니 “이렇게 장사 안되는 추석대목은 처음”이라는 상인들과 “귀성을 생각하면 공포를 느낀다”는 실업자들의 탄식이 제대로 들릴 리 없다.
노 대통령은 지난 달 말 ‘8ㆍ31 부동산대책’을 만든 여당의원들과 저녁을 함께 한 자리에서 ‘무위지치(無爲之治)’ 를 언급했다. “골프에서 어깨 힘을 빼는 게 중요하듯, 비록 대통령의 성정과 DNA에는 맞지 않아도 힘을 빼야 한다”는 건의를 받고서다. 알다시피 도가사상의 하나인 무위지치는 태평성대를 누리는 백성이 군주를 칭송하는 단계를 넘어 정치의 힘을 아예 의식하지 않는 경지를 뜻한다.
‘구시대의 막내’로 모든 것을 떠안고 가겠다는 노 대통령에게 과연 그런 치세가 올 지는 미지수지만 이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몸에 익혀야 한다. 노 대통령은 작년 추석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저음으로 말하기’를 올해 선물로 내놓아야 한다. 열병에 걸린 듯 들떠 삿대질하고 악다구니 쓰는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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