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 요즘 심상찮다. 종횡무진, 제대로 물 만났다. 올해 개봉작만 다섯편. ‘여자, 정혜’ ‘달콤한 인생’ ‘천군’ 등에 이어 ‘너는 내 운명’이 23일, ‘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 조만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배우 황정민(35)이다.
좋아하는 여자한테 말 한 번 제대로 못 건네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드러머 강수, 집에서는 위선적이고 밖에서는 정의로운 ‘바람난 가족’의 주영작 변호사, “아, 씨발” 한마디를 내뱉고 죽는 ‘달콤한 인생’의 미워할 수 없는 악역 백사장까지 그의 연기 변신은 변화무쌍하다.
“당연하죠. 맡은 역할이 각각이니 다르게 연기하는 거죠.” 다소 썰렁한 대답이다. 최근 다작에 대한 질문에도 그랬다. “직업이 배우인데 끊임 없이 연기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연기 안 하는 배우는 백수랑 다름 없죠.” 민망할 정도로 짧은 대답인데도 밉지 않은 건 그 단답 속에서 진심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단체영화 관람을 자주 갔는데, ‘피터팬’ ‘아가씨와 건달들’ ‘갈매기’ 등을 봤어요. 막연하게 무대에 대한 동경이 생겼던 것 같아요.” 그와 작업한 감독들은 그를 이미지가 없는 배우, 또는 무색무취의 배우라고 평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 오디션 당시 자기 소개란에는 스스로 “어떤 역할이든 연기 변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고 한다.
순박한 총각에서 비열한 악역까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얼굴을 그는 지녔다. “대본이 들어오면 참 여러 번 읽어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죠.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말하고 행동할까.
대본에 없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잔뜩 만들며 인물에 대한 탐구를 끝내야 비로소 연기를 할 수 있어요. 나조차도 인물에 대해 알쏭달쏭한 상태면 관객들한테 거짓말 하는 거잖아요.”
‘너는 내 운명’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순정적인 사랑 이야기지만, 세상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황정민의 연기 때문이다.
시골 노총각 석중이 새침한 다방 레지 은하(전도연)에게 첫 눈에 반해 갓 짠 우유를 매일 배달하거나, 오토바이 뒷좌석에 탄 그녀에게 고물 라디오를 목에 걸고 음악을 들려 주거나, 고무 대야에서 거품 목욕을 하는 알콩달콩한 연애가, 에이즈에 걸린 그녀를 끝까지 지키고 사랑하는 석중이 세상 어딘가에 실재하는 듯 느껴진다.
황정민을 버리고 석중을 정말 어딘가에 있음직한 인물로 만들어 낸 그의 연기 덕에 그 통속적인 연애담은 코 끝을 찡하게 하고 가슴에 와 닿는 현실감을 얻었다.
극단 ‘학전’ 출신으로 ‘지하철 1호선’ 등에 출연한 대학로 대표 배우였던 그는 “영화를 찍어 가장 좋은 점은 많은 관객들이 봐 준다는 것”이라고 했다. “관객 4, 5명만 앞에 두고 연극 무대에 선 적도 있으니까요.” 지난해 9월 연극배우 김미혜씨와 결혼한 그에게 “당신에게 ‘너는 내 운명’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단골 질문이다.
“동성애자로 나온 ‘로드무비’ 때는 ‘남자끼리 어떻게 키스를 하냐’는 질문이 단골이었어요. 그때 ‘지나가는 개도 예쁘면 키스하는 데 왜 사람한테 못하냐’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그래요, 사랑하는 아내인데 아픈 게 무슨 걸림돌이겠어요.”
숀 펜, 하비 케이틀의 연기가 그는 부럽다. 하지만 “그들의 타고난 시니컬한 느낌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따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선한 눈빛을 지녔다. 안양예고에 입학할 때부터 연기만을 생각했고 앞으로도 연기 외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연기 외에 해 보고 싶은 일은 없냐고 물었더니 “목수”라고 답했다.
5인치 대못도 3번 못질로 박을 수 있을 정도로 목수일에 자신 있다는 그. 목수라는 말이 주는 듬직하고 우직한 느낌이 지금껏 영화에서 쌓아온 그의 이미지와 묘하게 어울렸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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