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달콤함에 빠진 지식인들의 사고와 발언 수준이 국민을 무시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모독하기에 이르렀다.
최근 청와대 홍보수석 조기숙씨는 “대통령은 21세기에 가 계신데 국민은 아직 독재시대 문화에 빠져 있다”는 망발을 하고도 “문제 발언보다 문제 보도가 더 큰 문제”라는 궤변을 토했다. 얼마 전 청와대 정책실장 김병준씨도 ‘거대 정부’라는 비판을 받자 ‘크지도 작지도 않은 효율적인 정부’라고 말장난을 하면서 진실을 회피한 적이 있다.
두 사람 모두 대학 교수 출신이다. 대학 교수라고 해서 모두 지식인은 아니다. ‘지식인’이란 말에는 19세기 말 프랑스 우파 지식인들이 좌파 지식인들을 폄훼할 때 ‘잘난 체 하는 자’의 부정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 전에 무고하게 사형 언도를 받은 한 시민을 구명하기 위해 수 년간 발벗고 나섰던 대사상가 볼테르에게서 우리는 지식인의 원형을 발견한다.
사르트르의 지적대로 지식인은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에 뛰어드는 자’다. 드레퓌스 사건 때 에밀 졸라도 인종차별을 받는 남의 일에 끼어 든 지식인이다. 이렇게 지식인은 진실, 정의, 자유 등 인류 사회의 보편적 가치의 옹호를 위해 남의 일에 참견하며 비판하고 투쟁하는 자이다.
●국민무시 발언 어이없어
노엄 촘스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도 “지식인의 역할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진정한 지식인은 진실을 말하며 사익이나 이익집단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 심지어 권력의 핍박을 받더라도 권력자나 권력집단을 대변하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 교수들은 청와대나 국회 등 정치권에 들어가면 권력에 고용된 ‘식자(識者)’ 역할밖에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더 이상 지식인이 되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들이 청와대 정책이나 홍보 등의 직무를 맡게 되면 대통령과 국가의 일을 선전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이 독일 대중을 나치즘의 광기에 몰아 넣었던 선전장관 괴벨스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식인의 입을 빌려 교묘하게 때로는 해괴망측한 정치 선전을 한다.
조기숙씨를 보면 독재시대에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진 지식인을 연상케 한다. 국민이 독재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구시대에 머물러 있는 지식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씨는 “국민이 제대로 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다”, “국민의 여론이 참여정부의 객관적 성적표가 될 수 없다”는 등의 발언도 했다. 이런 말에 일리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판단을 원칙과 기준 없이 상황에 따라 자기 멋대로 갖다 붙인다는 것이다. 이런 언행은 3류 정치인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탄핵 반대 여론이나 여당의 총선 승리는 국민의 뜻이라고 말할 땐 언제고, 대통령 및 여당의 지지도가 추락하고 연정 반대 여론이 높은 것에 대해선 국민을 무시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권력에 고용된 識者노릇
권력에 종속되고 도취된 지식인이 권력에 아첨하는 무슨 말인들 못하랴. 만약 후에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제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사이비 지식인의 언행은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고, 그의 말에 제자는 물론 국민 어느 누구도 설득당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정치 교수들은 대학에 다시 들어오면 안 된다.
지식인은 정치인 유시민처럼 ‘노빠(노무현 오빠 부대)’의 ‘짱’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식인의 맹목적인 권력 추종이야말로 그가 보필하는 군주를 백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이다.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지성인이 ‘민주주의 열쇠’라고 말한 바 있다. 민주주의를 꽃 피우려면 우파건 좌파건, 청와대에 있든 대학에 있든 지식인들이 진리와 정의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현택수 고려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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