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저녁 술자리에 가면 으레 맨 먼저 나오는 말이 있다. “오늘은 연정론, 아니 노무현 대통령 얘기는 일절 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밥 먹자.”
그러나 소주가 서너 잔 돌고 나면 어느새 그런 다짐은 잊혀진다. 서로 앞을 다투어 자신이 느낀, 또는 전해 들은 노 대통령 이야기에 매달린다. 처음에는 제법 진지한 정책 비판 이야기로 시작됐다가도 술기운을 타고 금세 농담조로 흘러 버린다.
●‘스포츠’ 된 ‘대통령씹기’
“이 세상에서 도저히 불가능한 세 가지 일이 뭔지 알아? 하늘의 별 따기,스님 머리에 머리핀 꼽기, 노 대통령 입 막기야.” 좌중에는 한 바탕 웃음이 터지지만 모두들 뒷맛이 씁쓸한 표정이 된다.
술자리 성원들의 정치성향이나 계급의식의 문제는 아니다. ‘불편부당’(不偏不黨)을 사시로 삼아 온 신문사에 20년 이상 몸 담아 온 기자에 대해서는 굳이 성향을 따질 것도 없이, 그저 ‘제도권 언론’의 묵은 때가 빠지지 않았다고 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물려받은 재산 없이 맨손으로 노력해서 밥 먹고 살게 된 벗들이 대부분이고, 한창 때를 공장과 감옥에서 보낸 친구들도 여럿 섞여 있다. 도무지 ‘보수 골통’의, 구습에 얽매인 사고방식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세간에서 일상화한 ‘대통령 씹기’는 유시민 의원의 말처럼 일종의 ‘국민 스포츠’가 돼 있다. 국민이 틈만 있으면 대통령을 안주로 삼는 시대가 또 있었을까? 과거를 더듬어 보니 그런 때가 있긴 했다.
5공 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그랬다. 정치 행태, 생김새와 말 버릇은 물론 부인 이순자씨 일화에 이르기까지 ‘종합 안주세트’로 오르기 일쑤였다. 그때는 농담의 뒷맛 또한 깔끔했다. 국민은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일상의 삶과 무관했다.
지금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얼른 덮고 넘어가려고 농담을 꺼내지만 뒤끝이 그리 상쾌하지가 않다. 더러는 이렇게 멀리 나가도 되는 것인가 하는 걱정까지 은근히 하게 된다.
농담만이 아니다. 연정론도 그렇다. 처음에는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반응이 무성했다. 시간이 흐르자 ‘그래도 진정성은 엿보인다’는 말이 나왔다. 연정이 불가능하다면 선거구제라도 바꾸자는 얘기에 이르자 한나라당이 무조건 반대하는 이유도 조금씩 궁금해졌다.
더욱이 입만 열면 같은 얘기인 노 대통령의 입도 그렇지만, 한 신문에 하루에도 서너 개씩 실리는 연정론 비판 칼럼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지겨움이 절정에 달한 시점에 청와대에서 여야 영수회담이 열렸다. 예상대로 노 대통령이나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나 서로 할 말 하기에 바빠서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일 겨를이 없는 듯했다.
할 말을 다 하고도 아무런 합의점을 찾지 못했으니 연정론도 이제 끝났다는, 아니 끝내야 한다는 관측과 주장이 잇따른다. 그러나 정치적 손익계산에서 잃을 것이 없는 노 대통령으로서는 그만둘 이유가 없어 보인다.
두 사람이 마주 않은 모습은 노 대통령이 즐겨 온 ‘TV 토론’ 방식과 닮았다. 그 순간만은 그를 짓눌러온 반대론의 무게는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이런 대화가 이뤄진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평가는 애초에 판이 깔리기만 하면 무조건 이익이 되리라는 계산과 통한다.
무슨 얘기든 “그러니까, 한 번 해 보시라”는 대통령의 집요한 연정론이 국민에게 거부감을 주었겠지만 한편으로 무조건 “글쎄, 안 된다니까요”를 반복한 박 대표의 태도 또한 그리 곱게 비쳤을 리 없다. 결코 무승부가 아니다.
●국민이 마음의 준비 해야
그러니 주문 대신 마음의 준비를 하자. 연정론의 연장선상에서 어떤 얘기든 나올 수 있다고, 놀라지 말자고, 더 이상 가타부타하기도 지겹다고 마음을 놓아 버리자. 정치 빼고 국민끼리 이만큼이나 버텨 왔는데 대통령이 정치 판짜기에만 매달리는 걸 보면 아직 한국사회의 정치 관심이 지나친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행복하고자 한다면 국민이 마음을 비우는 수밖에 없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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