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책과세상/ 머리 속의 악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책과세상/ 머리 속의 악마

입력
2005.09.09 00:00
0 0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장편소설 ‘머리 속의 악마’가 번역 출간됐다. 지난 혁명의 세기를 몸부림치고 허우적거리며 헤쳐 나오다 끝내 탈진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다.

매혹적인 육체와 현란한 지성을 지녔으나 단 한 순간도 행복하지 못했던, 좀처럼 잊히지 않을 그의 이름은 ‘벵자멩’이다.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시대를 휘갑했던 거대 정신들, 레지스탕스 정신에 기반을 둔 반인종주의, 알제리 전쟁과 숱한 제국주의 분쟁의 와중에 유럽의 지성들을 충동했던 휴머니즘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시즘, 마오쩌둥주의 등을 극단적으로 구현한 존재.

권력을 쥔 왕년의 레지스탕스 부르주아들의 타락과 새로운 파시즘으로의 회귀, 68년 5월 혁명의 좌절 이후 미쳐버리거나 자살하거나 변절해버린 옛 동지들의 모습, 매를 두려워하는 비루한 개처럼 창백한 프롤레타리아의 실상에 누구보다 뜨겁게 분노하고 격렬히 슬퍼한 인간.

어디에서도 인류 구원과 인간 욕망의 개조라는 희망을 찾지 못한 채 팔레스타인 게릴라로, 테러리스트로 변신하지만 그마저도 실패하고, 난파당한 42년의 실존을 미망의 코미디였다고 자조한 남자.

출세를 종용하는 옛 동지에게 “난 지금 이 사회에도, 앞으로 다가올 어떤 사회에도 결단코 속하지 않을 것”(445쪽)이라 말할 때, 자진을 앞두고 “나는 결국 인간을 지나치게 사랑한 까닭에 인간을 증오하게 되었다”(622쪽)고, 스스로에 대한 형벌처럼 “어떠한 삶이든, 비록 똑 같은 삶일지라도, 다시 시작되는 삶이란 가장 잔인한 형벌이리라”고 독백할 때, 그의 그늘진 동공과 스산한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는 1942년 나치 치하의 프랑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페탱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나치의 끄나풀 노릇을 하는 사업가로, 종전과 함께 체포돼 처형당한다.

적당히 온정적이고 충분히 낭만적인 어머니는 남편의 친구이자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해방 조국의 고위 관료가 된 남자(재혼을 위해 친부의 처형을 은밀히 사주한 장본인)와 재혼한다.

집에서는 친부에 대한 언급 자체가 금기다. 꿈과 상상을 통해 미화하고 추앙했던 친부의 실체와 양부의 파렴치함을 알게 된 이후 벵자멩의 삶은, 지난 세기의 역사와 그 속에서 길 잃고 헤맨 뒤죽박죽의 운명들처럼 뒤틀리고 엉키다 끝내 혼돈 속에 스러진다.

이야기는, 한 소설가가 벵자멩의 삶을 추적하는 궤적을 따라 전개된다.

유년의 벵자멩과 가족 이야기가 담긴 어머니의 일기, 의붓아버지와의 대화, 벵자멩의 숱한 배신과 외도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그를 사랑하며 목숨까지 바치는 연인 ‘마리’의 편지, 벵자멩의 친구처럼 지내지만 실상은 그의 삶을 교묘히 조종한 것으로 밝혀지는 변호사 ‘파라디’의 증언, 종적을 감추기 직전 남긴 벵자멩 자신의 기록과 고백이 각각의 형식에 따라 5개의 장을 이루고 있다.

이 책은 신철학의 기수로 통하는 철학자이자 소설가, 잡지 발행인, 영화감독, 극작가이기도 한 레비의 첫 소설(1984)이다. 책에는 철학 에세이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1977)등의 저작으로, 종군기자로, 아프가니스탄과 유고 등 현대의 야만이 날뛰는 각종 분쟁지역에서 벌인 활동을 통해 보여 온 그의 철학과 신념이 스며 있다.

긴박한 스릴과 치밀한 음모의 전개, 숨가쁜 에로티시즘과 깊이 침잠해 드는 사유의 문장들…, 700쪽 가까운 분량조차 아쉽다는 느낌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