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을 비롯해 전문가들로부터도 개혁을 요구 받던 국가정보원이 마침내 불법도청으로 해체론까지 거론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국가 정보기관 압수수색이란 사상 초유의 일은 오늘날 국가 최고 정보기관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우리 직원의 그 어느 누구라도 그날 그 위치에 있다면 나와 똑같이 행동 하였을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한 직원이 마지막 남긴 말이다.
비록 아픈 역사의 한 단면이라지만 절대 복종의 원칙에 따라 자기 책무에 진력해야 한다는 정보기관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이 때문에 대통령 직속 기관인 국정원은 지도자의 의중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때로는 정권 안보에 눈이 어두웠던 시절도 있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 설 때마다 민주주의를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며 갖가지 통치 철학을 내세우기도 하였지만 법에 의한 통치 보다는 통치자와 집권세력에 의해 국정원은 심대한 영향을 받아 왔다.
그 와중에 많은 인원이 영문도 모른 채 강제퇴직 당하여 사회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실직자 신세로 전락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국정원의 국가 안보와 관련한 정보 활동은 간과하고 무차별적인 비난만 하는 것은 미래의 국가 안보체계에 심한 상흔으로 남을 것이다.
현재 국정원 개혁의 일환으로 국내와 국외 정보체계를 분리하려는 시도가 일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국은 오히려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업무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정보 수집능력을 종합, 분석, 평가하는 정보통합의 추세로 가고 있다.
최근 미국은 국내외 정보교류의 미흡으로 9ㆍ11테러 예방에 실패 했다고 판단, 15개 정보기관을 총괄, 조정하는 국가정보국장(DNI) 자리를 지난 4월 신설한 바 있다.
또 영국은 해외정보국(MI6),국내정보국(MI5),통신정보본부(GCHO)의 통합을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일본을 비롯한 세계 주요국들도 국가정보 체계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반도 주변 상황을 살펴 보더라도 미국이 동북아 세력균형의 키워드를 중국통제에 두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한국이 전향적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보기관의 개편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국내 정보업무를 분리할 경우 조직ㆍ예산의 비효율성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인력 및 예산의 확대에 따른 국가 예산 낭비를 가져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보체계의 신속성 저하로 분석, 평가가 미흡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정보 신뢰성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한 첨단기술의 발달로 글로벌화 한 테러 및 국제연계 범죄조직 등 초국가적 안보 위협 요소에 효과적으로 대응 할 수 없다.
격동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국정원은 내적으로는 탈정치, 탈권력화를 지향해 왔다. 감찰 업무를 강화해 자체정화에 노력을 기울여 왔고 국가전산망의 보안관리 체계를 보강하기 위해‘국가사이버안전센터’를 설립, 3,500여 건의 전산망을 복구, 지원 한 바 있다. 이밖에도 국가 산업보안 활동을 수행해 19조원에 달하는 국부 유출을 방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21세기 국정원의 시대적 사명은 분명하다. 경제 전쟁에서 국가 기밀과 국부 침해 행위를 색출하는 전략 정보분야의 역할을 확대하고 신(新)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활동을 강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관계요원의 전문성을 높이는 일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김병창 전 국가안전기획부 기획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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