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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25) 전 국립박물관장 정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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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25) 전 국립박물관장 정양모

입력
2005.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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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나보고 선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박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서는 큰 존칭이었다. 선생은 자기 분수를 알고 절개를 지키고 정신이 바로 서고 인격이 높고 학문이 깊고 높은 선비라야 한다. 나는 수십 년간 여러 대학에 출강하여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노릇을 한 것은 틀림없지만 올바른 선생의 칭호는 격에 맞지 아니 한다.

또한 박사학위를 받은 적이 없고 명예박사학위만 받았으니 박사라는 칭호도 역시 틀린 말이다. 그러니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 축에 끼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사이비 학자요 얼치기로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야만 진짜 선생과 진짜 박사와 학자들이 그래도 저 사람이 자기 분수는 아는구나 하고 비웃지는 아니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 졸업 후 공군사관학교에서 국사교관을 하였다. 제대 전 당시 국립 박물관의 김재원 관장님과 김원용, 윤무병 선생님이 박물관에 오면 공부하는 분위기도 좋고 연구자료도 풍부하니 공부하고 싶으면 박물관으로 오라 하시어 제대 후 박물관 관원이 되었다. 미술과에서 일을 시작하였고 회화사를 관심있게 들여다보기도 하였지만 결국 도자사에 집중하게 되었다. 역사와 철학 등은 과거, 현재, 미래를 기록과 사색을 통해서 그 학문을 연구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시각을 통한 조형상의 연구가 아니라 시각에 호소하지 아니하는 정신적인 연구다. 미술사는 시각을 통한 조형 연구가 위주이면서 그 시대사도 꼼꼼히 따져 보아야 한다. 이러한 연구가 기본이 되어 그 시대마다의 조형정신 또는 역사성을 되짚어 볼 수도 있고 또 이를 미학이나 철학으로 연관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박물관원이 되면서 처음 역사고고학에 관심이 있었으나 여러 가지 형편이 있었지만 혜곡 최순우 선생의 인품과 안목과 학식에 젖어들어 미술과에서 미술사를 넓게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대학졸업논문으로 우리나라 조운(漕運)에서 해로 중 험로(險路)에 관한 논문을 썼다.

역사논문은 수많은 원전과 기존논문을 넓게 섭렵하고 정리 분석하는 것이지만 미술사 논문도 물론 원전과 기존논문이 필수적이면서 한 가지 더 실체(실물)를 보고 느끼고 실측하고 사진 찍고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유적조사 발굴 현장에서 땀 흘려 고생하지만 엄청난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연구를 하는 기쁨과 보람에 미술품을 보고 느끼고 찾아내고 거기서 얻어지는 가슴 뿌듯한 즐거움과 보람이 더해진다.

어깨너머 지식이지만 겸재와 단원을 20대 후반에 보았을 때의 그 느낌과 즐거움이 30대가 다르고 40대와 50대, 60대가 각기 다르고 지금 70대가 또 다르다. 그때마다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겸재, 단원을 비교하고 감상하는 안목이 달라진다. 이러한 즐거움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는 독특한 기쁨이다.

이때 그 필력과 설채와 구도 등을 서로 이야기하고 아름다움을 같이 느끼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은 무한한 희열인 것이다. 또 학생들에게 전달하였을 때 조금씩 내 뜻과 지식과 감상안목이 전해져서 그들이 조금씩 공감하고 몇 년 후에 “선생님말씀을 이제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였을 때 가슴 뿌듯한 보람도 느껴 본다.

도자기 공부는 우연찮게 시작되었다. 1962년 당시 미술과 직원은 다섯 명이었지만 혜곡 선생과 내가 조수로 미술사 전반을 다뤄야 했다. 그 때 이미 고고학은 학문적으로 꽤 틀이 잡혀갈 때였다. 미술사는 최순우 선생이 고군분투하실 때에 고고학 하시는 선배 동료 관원 중 대학으로 가신 김원용 선생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미술사에는 관심이 거의 없고 그 분들 중에서도 어떤 분은 도자기는 학문이 아니라고 하던 때였다.

도자기는 한 두어 주일쯤 열심히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서양과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중국 도자사를 중심으로 동양도자사연구가 매우 활발하고 그 업적도 대단하였는데 여기에 비해 우리나라는 학문적 기반이 매우 약했다. 일인들이 저술한 두어 권 책과 도록류 몇 권, 조사보고서 여러 권과 일본 도자잡지에 실은 한국도자 관계논문 몇 편과 약보고 정도가 전부였다. 따라서 도자사를 연구하고 체계를 세우려면 할 일이 태산처럼 많았다.

도자기는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어 그 역사 또한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어 아주 서서히 그리고 착실하게 그 시대마다의 인류 생활 형편과 문화생활 정도에 맞게 발전하여왔다.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그 나라와 각 지역마다의 자연과 문화발전에 따라 각기 특색 있는 도자기를 생산하여 전 세계의 도자기가 문화권마다 국가마다 지역마다 그 특징에 차이가 있는 것은 물론이고 발전과정과 속도에 큰 차이가 있다.

같은 동양권에서도 특히 중국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도 그 발전과정과 속도가 전혀 다르다. 중국은 토기문화부터 시작되어 탓?점진적이고 착실하게 흑도, 도기, 청자, 자기로 이행되었으며 7~8세기 당(唐)대에 이미 자기를 완성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보다 훨씬 뒤졌지만 자기의 생산은 중국과 1~2세기 차이가 나는 9세기후반에 완성한다. 일본도 토기의 생산은 중국과 우리보다 빨랐다고 하지만 도기의 생산도 우리보다 늦고 자기의 생산은 중국과 우리보다 10~8세기나 늦다.

그래서 시대별 국가별 지역별로 그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극동 삼국의 도자기를 수백 점을 한자리에 모아놓아도 어렵지 않게 단 시간 내에 국가별 지역별 시대별로 가려 낼 수가 있다. 국가별, 지역별, 시대별 특징이 그 도자기에 다 쓰여 있기 때문이다. 문자로 나타내지 아니하여도 그 조형(문양, 장식 포함)이 문자 이상의 것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구분한다고 하지만 드물게는 몇 점을 함께 놓아도 가려내기가 막막하고 더구나 시대구분은 더욱 어려울 때도 있다.

감정이라는 것은 10년 20년이 지나고 30년이 넘어서야 어느 정도 가능하니까 이제 40년이고 다음 50년이면 더욱 자신 있게 분류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때는 한 점을 가지고 몇 시간 몇 날을 고민하고 참고도서를 수없이 뒤적여도 결론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에 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 등에서 조선 도자기에 관계된 특정한 기록을 찾는 중 우연히 미해결의 문제를 푸는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기도 한다.

또한 도자기의 전체 조형 중 구부의 정리나 굽의 정리 또는 주문과 종속문 등을 따로따로 정리하면서 그 어려운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는 수도 있다. 마치 짙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하지 어려웠는데 일거에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확 트이는 그러한 즐거움도 있다.

문화 문명은 자주 바뀐다. 다른 나라와 폭넓은 교류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언제나 새 시대에 맞는 발전방향으로 변화하게 마련이다. 이것을 역으로 생각해서 현재에서 과거를 되짚어 올라가보면 변화하는 원인은 무엇이며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밝히려는 노력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것은 또한 한국인의 미감이 고대에서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조금씩이나마 어떻게 변하여 조선말의 시점에서 한국인의 미의식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와 자연연결될 것이다.

도자사 연구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풀어나가고 그 체계를 세우는 일들도 보람이 있는 일이지만 그렇게 된, 그렇게 되어야만 했던 이유와 원인이 규명되는 일도 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든 일에는 원고를 써야만 하는 고통이 뒤따르지만 그러한 과정에서의 즐거움과 보람과 성취감 또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동양 삼국의 도자기만 비교해도 그 아름다움이 전혀 다르다. 중국대로 일본도자기대로 아름다움이 있지만 우리도자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과는 비교가 되지 아니한다.

혜곡 선생은 “우리 조상님네가 이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을 창출하여 우리에게 남겨준 그 고마움에 가슴이 미어지고 너무나 엄청난 기쁨을 주체할 수도 없다”고 하였다. 아름다운 도자기를 언제나 가깝게 접하고 어루만질 수 있는 즐거움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무슨 마음으로 이러한 조형을 창출할 수가 있었을까?

벼라별 공상을 다하기도 하고 오랜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너무나 벅찬 감격에 가슴이 미어지기도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얼싸안고 통곡이라도 해야 벅찬 감동을 삭여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 같을 때도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니 40여 년 전 “저 사람은 사금파리나 주우러 다닌다”는 말이 지금도 내 가슴에 산들바람처럼 용기를 주고 있고 희망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길을 어찌 아니 가겠는가.

●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은

정양모 전 국립박물관장은 도자기 분야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전문가로 손꼽힌다. ‘고려청자’ ‘백자’ '분청사기’ ‘한국의 도자기’ 등 이 분야 역저를 여러 권 냈다.

그는 국학자인 위당 정인보 선생의 4남4녀 중 일곱번째로 193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62년 국립박물관 학예직으로 들어간 이래 박물관에서 전통문화 연구에 매진했다. 국립경주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국박)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93년부터 99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다.

국박 학예연구실장으로 재직하면서 한국문화를 외국에 알리는 데에도 힘써서 ‘한국미술 5천년전’ 순회전을 미국 8개 도시와 일본 3개 도시, 유럽(영국, 독일)에서 개최했다. 85년부터 문화재위원을 맡고 있으며 올 5월까지 임기 2년의 문화재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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