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에서 차로 2시간 거리인 팔달령은 중국 정부가 관광 목적으로 처음 개방한 만리장성의 군사기지이다. 팔달령에 올라 바라보면 험준한 산봉우리 사이 능선을 따라 두터운 담벼락을 이룬 만리장성은 총안(銃眼)까지 촘촘히 뚫어 놓아 가히 난공불락의 요새라 할 만하다.
기원 전 3세기경 진시황이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하기 시작한 이 장성은 이후 수, 당, 명나라를 거치면서 전체 길이 6,400㎞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 대제국들도 내부의 혼란과 부패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명ㆍ청 교체기에는 50만 대군을 이끌고 만리장성 북쪽 산해관을 지키던 장수 오삼계가 병력이 3분의 1에 불과한 청의 누르하치에게 스스로 장성을 열고 만다. 결국 관문 하나가 뚫림으로써 만리장성은 청군의 베이징 침탈에 가장 용이한 침입 통로가 되었고 명의 패망을 앞당기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조하던 무렵 서양에서는 로마제국이 아피아 가도(Via Appia) 건설을 필두로 로마에서 북유럽과 이베리아 반도까지 이어지는 장장 15만㎞의 ‘로마의 길’을 건설한다.
●소통-교류가 혁신 밑거름
폐쇄적 성격의 만리장성과는 대조적으로 이 길은 로마의 선진 문명이 서방 각지에 전파되고 이민족의 문물이 로마에 들어와 융화ㆍ발전ㆍ확대재생산되는 선순환적 피드백 고리를 형성하게 된다.
이로써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생기면서 팍스 로마나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적 촉매로 작용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이후에는 유럽 각지에 기독교를 확산시켰으며 후대에는 로마와 그리스 문화를 창조적으로 부흥시킨 르네상스의 촉진제가 되었다.
동서양을 지배하던 두 제국이 군사적 목적으로 추진한 대규모 공사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까지 역사적으로 서로 다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로 개방성에 뿌리를 둔 교류와 소통이라는 네트워크의 차이이다.
후기산업사회를 지나 지식 기반 경제 체제로 이행하고 있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네트워크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활발한 네트워크는 서로 이해하고 교류하는 차원의 기능을 넘어 관성적 사고의 틀을 깨는 혁신을 촉발하는 데 효과적임이 밝혀지고 있다.
프랭스 요한슨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 메디치가(家)가 지원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단테, 마키아벨리 등 당대의 천재적 예술가와 학자들의 교류가 르네상스라는 문명의 새 전환점을 이루었다는 점을 들어 ‘메디치 효과(Medici Effect)’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즉, 상이한 관습이나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 간의 교류와 분야 간 조합을 통해 혁신이 일어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따라서 네트워크 활동이 활발한 조직이나 사회일수록 창의적 혁신이 일어날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사회현상을 관찰하다 보면 주변의 많은 문제가 관계의 단절이나 폐쇄적 성향에 기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역갈등이나 정치적 불협화음 역시 알게 모르게 둘러쳐진 수많은 물리적, 정서적 장벽으로 인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네트워크가 끊겨져 있기 때문 있음을 알 수 있다.
●합동연구로 R&D 촉진을
필자가 몸담고 있는 과학기술계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정부 출연 연구소의 기본연구에서 차지하는 연구소 간 협동연구 비율은 0.6%로 매우 저조하다. 연구개발(R&D)은 창의성이 생명이다. 따라서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롭게 발전해나가기 위해서는 장벽을 허물고 이종 간의 수많은 의식적ㆍ무의식적 교차점을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출연 연구소로부터 학제 간 연구가 촉발되고, 대학과 기업 간의 연결핀으로서 국가 R&D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선순환 고리를 형성하여 과학기술 분야에서 팍스 코리아나의 시대가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유희열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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