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지 60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친일 인사 명단을 공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두고 한편에서는 만시지탄이라는 소리가 높다. 그런가 하면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하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명단 발표로 새삼스러운 논쟁이 지펴지고 있다.
그 동안 친일파 문제는 줄곧 우리 역사의 큰 숙제였다. 친일파는 말 그대로 일제 침략자 편에 선 자들이다. 그들은 크던 작던 친일의 대가를 챙길 수 있었다. 해방 후 그들은 반민족행위자로서 사법적인 처벌 대상이었다. 당시 일제의 식민 침탈로 야기된 오욕을 청산하는 일이야말로 전사회적으로 논란의 여지없이 동의가 형성된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친일파들을 재활용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런 이승만의 방해로 반민특위 활동은 성공할 수 없었고, 친일 인사들은 처벌 받기보다는 반공독재체제의 중심 축으로 기능하면서 지배층으로 부상했다. 그 후 군사정권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식민지 침탈, 독재 정치, 권력 찬탈의 동반자로서 이권을 챙기면서 지배자로 군림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 파행의 근본 원인은 친일파 미청산에 있다고 보고 이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 온 것이다.
●식민잔재 '시간'이 해소못해
이들 친일파의 경우 특히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상황에 따라 변신하면서 그때마다 자기 합리화를 꾀하는 사이비성에 있다. 권력에 아첨하고 폭력에 기생하면서 독재자를 미화하고 여론을 호도해 왔다. 이러한 풍토는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을 통해 오늘날까지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어떤 이는 얼마 전에도 일제 침략을 심지어 축복이라고 주장했다. 청산되지 못한 식민 잔재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소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그러니까 친일파 청산의 실제 필요성은 일제시대 행적보다는 해방 이후 행적 때문이라고 하겠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과거 행적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혹은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서 예정대로 그들을 처벌했거나 적어도 중요한 공직에서 배제시키는 올바른 기강을 세웠다면 어땠을까.
친일파 문제는 역사적으로 정리되고 수 십년 간 아까운 역량을 소모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마땅한 절차에 따라 처리되었다면 오늘날에 더 이상 제기될 논란도 없게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친일파가 초래한 파행의 역사를 겪지 않아도 되었다.
이번 명단 공표를 통해 진실에 대한 사회적 확인과 과오에 대한 자기반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처벌이나 응징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역사에서 큰 짐 하나를 덜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럼에도 일각에서 본질을 왜곡하고 명단 흠집내기에 골몰하는 것은 역사 왜곡을 계속해 가겠다는 것과 같다.
이는 친일파의 후광으로 확보한 기득권에 대한 집착이다.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는 시간이 흐른다고 잊히거나 묻히지 않는다. 언제고 처리될 때까지 숙제로 남아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진즉 처리해야 할 과제를 60여년 미루어 온 과정에서 치룬 대가가 사실 너무 크다.
●과거사 밝혀 역사의 짐 덜어야
지금 세계적으로도 여러 나라에서 과거 청산이 새삼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동유럽을 비롯해 중남미 각국은 지난 시기의 과거사 문제로 뒤늦게 뜨겁다.
그 동안 대체로 과거사를 들추지 않고 덮고 지나가려 했지만 어느 나라도 성공하지 못했다. 스페인의 경우도 프랑코 시대의 과거사를 이른바 망각의 협정을 통해 봉합하고자 했지만 결국은 뒤늦게 과거청산에 나서고 있다.
흔히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고 말한다. 이는 주로 시간을 벌어 책임을 호도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역사는 시간으로 희석되지 않는다. 이번의 경우에도 6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친일의 기억은 갈수록 명료해진 것을 보여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그 윤곽이 뚜렷이 드러난 것이다.
안병욱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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