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사고 피해자가 총기 소송이 있는 지역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신분을 바꿔 배심원단에 들어가 능란한 언변으로 다른 배심원들을 설득해 자기가 원하는 결론을 끌어낸다.’ 미국 배심제도의 허점을 다룬 영화 ‘런어웨이 쥬어리(Runaway Jury)’의 줄거리다.
3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국민참여 형사 모의재판’에서도 유사한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이날 구성된 배심원단은 정식 배심원단을 포함해 모두 5팀이었고, 배심원단마다 결론이 크게 달랐다. 두 팀이 만장일치로 무죄, 세 팀은 만장일치 또는 다수결로 유죄 의견을 냈다.
법원 관계자들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본 것은 말솜씨 좋은 한 두 명이 배심원단 전체 의견을 좌우한다는 점이었다. 9명으로 구성된 정식 배심원단이 8대1의 표결로 유죄 의견을 낸 데에는 한 여성 배심원의 주장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다른 배심원들이 의견 개진에 소극적인 가운데 그는 유죄 의견을 논리적으로 피력해 논의를 주도했다. 배심원단 논의의 90% 가량을 그와 무죄를 주장한 다른 한 명의 배심원이 독점했다.
배심원 선정에서 검사나 변호인은 다른 배심원에게 불리한 영향을 줄 사람을 배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제도의 경험이 없는 우리나라에선 이들을 사전에 가려낼 판단기준 조차 제시할 수 없는 형편이다. 소수가 전체 의견을 지배할 수 있다는 점은 토론문화에 익숙치 않은 우리 현실에서 배심제를 도입하는 데 특히 보완할 부분이다.
배심원들의 법률지식 차이도 개선할 점으로 꼽혔다. 증거능력이 인정된 진술 혹은 물증만을 기준으로 유ㆍ무죄를 판단해야 하는데, 일부 배심원은 물증보다 심증을 우선했다. 검사나 변호인의 근거 없는 추측을 입증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근거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했다.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의 증거가 없으면 무죄로 판단한다’, ‘범죄 입증 책임은 검사에게 있다’ 등의 재판원칙에 대한 이해 부족도 드러났다. 재판부는 “살인을 지시할 만한 동기가 납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시민배심원단은 검찰의 논리가 변호인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이유로 유죄 의견을 냈다. 막판에 검사가 무려 40분 동안 배심원단을 설득한 게 결정적이었다.
배심원단 구성도 어려운 과제로 떠올랐다. 부부관계나 불륜과 관련된 사건에서는 성별에 따라 선입견이 작용할 수 있다. 남편이 부인을 살인 교사한 사건을 다룬 이번 모의재판의 배심원단은 여성(6명)이 남성(3명)보다 두 배 많았다.
법원 관계자는 “2007년부터 5년간의 시범기간에는 배심원단 결정을 재판부가 참고만 하지만, 배심원단 평결이 신뢰를 얻지 못할 경우 제도무용론이 나올 수도 있다”며 “모의재판을 분석해 보완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김지성 기자 j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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