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아름다움을 위해 순교할 수 있을까? 죽음의 연습이라도,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까? 누가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을 으깨고 남을 으스러뜨리며 자학과 가학과 피학의 향연을 벌일 수 있을까?
누가 아름다움을 위해 흉악망측스런 탈을 쓰고 악마와 거래하며 제 몸과 마음을 병통(病痛)의 소금기로 절일 수 있을까? 19세기 유럽문학사는 진지한 마음자리 위에 그런 몸부림을 섭새김질해놓은 탐미주의자들을 몇몇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이상과 서정주에게서 잠깐 그런 기미가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상은 너무 일찍 죽었고, 서정주는 그 체질이 (문화적) 보수주의자였다.
젊은 시절의 황지우는 “미는 나의 본능이었다. 남이 토해낸 것을 한 번만 더 보면 참 다채롭다”고 으쓱거린 바 있지만, 그의 탐미주의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피륙을 찢어내지 못했다. 아니, 찢어낼 생각이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약았달까, 지혜로웠달까?
온건했달까, 비겁했달까? 어느 쪽이 됐든 아름다움에 대한 황지우의 신앙은, 보신(保身)의 유미교(唯美敎)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망신(亡身)의 유미교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그 점에서 그는 사이비 사제였다. 유미신(唯美神)은, 그 취향이 파괴적이어서, 제 사제들에게까지도 망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망신을 무릅쓴 진짜배기 탐미주의를 보기 위해서, 믿음의 순도로만이 아니라 제례의 우아함으로 신을 기쁘게 할 진짜 유미교를 보기 위해서, 한국 문단은 강정(34)의 ‘처형극장’(1996)을 기다려야 했다.
“나의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너는 죽어야 한다”(‘아름다운 적’)는 선언을 듣기 위해서 말이다. 나온 지 10년이 돼 가는 이 시집을 나는 최근에야 처음 읽었다. 놀라웠다.
그리고, 이 시집이 나올 즈음 내가 나라 바깥으로 떠돌고 있던 탓이기도 했지만, 이 놀라운 시집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처형극장’은 주머니 속의 송곳 같은 재능의 자수(刺繡)다. 그 재능은 감수성의 재능이자 표현의 재능이다. 이 시집의 한 화자가 “해보지 않아도, 내 몸으로 행해보지 않아도 다 알 것 같던 선험의 미지의 탑(塔)을 내 구축하리라”(‘초토에서’)고 말할 때, 시인의 자아가 투사돼 있을 그를, 그의 말을 독자는 믿어도 좋다.
‘처형극장’의 아름다움은 음지의 아름다움, 검(붉)은 아름다움이다. 그 습한 아름다움은 들머리의 시 ‘아름다운 흉조(凶兆)’에서 일찌감치 펼쳐진다.
“세상의 어둔 습지에서 늙는 짐승들과/ 알몸으로 뒹구”는 신(神)들의 사랑은 “해골들의 입을 열”어 어둠의 말을 하게 하고, “어둠의 분말들이 일제히 흩어져 울리는/ 높푸른 종소리를 좇아 올라간”다.
그 곳, 지옥에서, “무너져 아름다운 핏물을 뿌리며/ 빛덩이가 채찍처럼 일렁인”다. 이 시의 무대도 습지이거니와, ‘처형극장’의 분위기는 대체로 습하다.
한 화자는 “나의 습한 천성”(‘구멍에 대하여’)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그 습함은, 그 축축함은 눈물과는 무관하다. “신학교를 중퇴한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 속에 어둠으로 향하는 구멍을 열어놓아야만 했다(‘귀머거리 성자’). 습기는 그 어둠으로 향하는 구멍에서 나오는 것일 터이고, 그것은 이를테면 라텍스의 끈적끈적함 같은 것이다.
죽음과 섹스의 상상력은 곰팡이나 버섯 같은 균류(菌類)의 홀씨처럼 ‘처형극장’의 습한 공간에 널따랗게 퍼져 있다. 자목련 꽃잎 위에 아찔한 성적 판타지를 포개놓는 ‘목련아, 목련아, 목련아’ 같은 작품은 그 심상한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시집의 화자들은 제 시선이 머무른 곳에서 성과 죽음의 희미한 흔적만 보여도 그와 연관된 상상력의 파노라마를 자욱히 펼쳐나간다.
성과 죽음이 악마주의자들의 탐미적 거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처형극장’에 모인 작품들을 쓸 무렵 시인의 나이가 (성 충동과 죽음의 충동이 가장 깊은 곳에서 잇닿아 있다는 가설과는 무관하게) “(물리적) 청춘과 (관념적) 죽음이 맞붙은”(‘I’m Waiting for the Man’) 20대 전반기였다는 점에서도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이를테면 “죽은 돌과 썩은 나무들이 교미하여/ 영원불멸의 미녀들을 뽑아내”(‘서기 2001년 아침, 나는 외출하지 않았다’)는 장면을 (상상 속에서)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이 너무도 천연스럽다는 점이다.
시인은 보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에게는 보인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핀 오규원의 시선이 벼려진 시선이라면, 강정의 시선은 타고난 시선이다. 게다가 강정의 화자들은 견자(見者)의 시선을 조롱할 줄 아는 견자다. “꿰뚫어보는 자의 눈이란 사실, 그 자신의 누렇게 썩은 피의 근원의 냄새가 나는 배꼽보다도 더 멍청해 보이는 게 아닐까?”(‘초토에서’).
천연스러움은 그 시선을 담아내는 언어에서도 또렷하다. 한 화자는 “난 실상 개념어들의 시산(屍山) 같은 세기의 습속에 편입되는 이상에 늘 충실하다”(‘시간아, 너 갈 데 있니?’)고 털어놓는다.
겸손이나 자책의 맥락에서 발설된 이 말은 되레 ‘처형극장’을 짜고 있는 언어의 단단함에 대한 자랑처럼 들린다. ‘처형극장’에서 놀라운 점 하나는 문장을 부리는 시인의 강건한 힘이다.
언어의 느슨함을 시적 여백이라고 우기는 풍토가 미만한 시대에, 잘 지어진 건축물 같은 강정의 언어는 미덕이랄 수밖에 없다. 이렇게 튼튼히 조립된 언어들은, 이 시집에 출렁이는 격정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사고가 튼튼한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처형극장’의 아름다움은 한국어의 내재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언어를 조직하는 힘의 아름다움이다. 소월이나 영랑의 시어에 길들여져 있는 독자라면, 이 시집의 상상력만이 아니라 언어에서도 거리를 느낄 것이다. ‘처형극장’의 언어는, 어휘 수준에서든 통사 수준에서든, 일종의 번역어다.
더러는 ‘개념어들의 시산’이다. 영화배우 말론 브란도를 소재로 한 ‘이런 우주를 말하라’의 화자는 “나는 그의 가장 둔탁한 한국판(版) 각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발언은, 그것이 내던져진 맥락과 상관없이, 고스란히 시집 전체에 해당된다. 그것은 강정의 언어가 외국어로 번역돼서도 읽힐 수 있는 언어라는 뜻이다.
시인은 어느 자리에서 이상과 김수영에 대한 경의를 간접적으로 표한 바 있다. 아닌게아니라 ‘이런 우주를 말하라’에서만 해도 김수영의 말투가 강하게 느껴지고, ‘초토에서’ 같은 작품은 대뜸 이상(의 산문)의 요설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이 두 시인은 한국어(의 리듬)에 그리 능했던 시인이 아니다.
그렇다고 ‘처형극장’을 리듬이 거세된 시집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단지 그 리듬이 이를테면 데쓰메털의 빠르고 격렬하고 거친 리듬을 닮았을 뿐이다.
표제시 ‘처형극장’을 포함해 이 시집의 몇몇 작품이 극장을 직접 거론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시집 ‘처형극장’은 기다란 옴니버스 연극이랄 수도 있다. 이 연극은 모노드라마다.
유일한 등장인물인 주인공의 대사 속에는 그 때까지의 제 삶만이 아니라, 아마도 시인과 겹쳐질 화자의 시론(詩論)과 미학관, 인생관이 담겨 있다.
예컨대 “한 명의 인간이 그 자신의 망령과 함께 죽음을 실연(實演)하고 있다”(‘극장’)거나 “배우인 나는 한 번도 죽어보지 않았기에 무대가 곧 나의 무덤임을 안다 나의 대본은 없다 나는 나를 펼쳐놓고 모방할 뿐이다”(‘배우는 퇴장할 줄 모르고’) 같은 대목은 문학에서든 삶에서든 자신을 배우로 파악하는 시인의 태도를 드러낸다.
또 “내 삶이 한없이 망가지고 아름다워지는 타락의 순결”이라거나 “절대적 무화(無化)와 절대적 정화(淨化)의 길”(‘초토에서’) 같은 구절은 시집 ‘처형극장’의 미학을 요약하고 있고, “병들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나, 완전한 죽음은 병 근처엔 다가오지 않아 치료받지 않으며 나는 모든 사소한 죽음들을 수락할 테야”(‘당신을 만난 이후로’) 같은 대목은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청년시인의 삶의 전략을 드러낸다.
‘처형극장’은 이 점에서 일종의 병상일기다. 그것은 환각의 상태를 그리는 각성된 언어다.
인생을 실었든 내려놓았든, 문학을 포함한 예술의 일차적 지향은 아름다움이다. 다시 말해 문학은 장신구다. 목걸이나 귀고리나 반지 없이도 살 수 있듯, 사람은 문학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러나 문학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다. 인간이 공작새나 벚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이 장신구 덕분이다. ‘처형극장’은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장신구다. 그 검붉게 화려한 말의 잔치상 앞에서 독자는 어질어질하다. 이 시집 하나로 강정은 우뚝한 시인이다.
● 아름다운 흉조(凶兆)
알고 있나요?
복음서의 뒷장을 열고 밤마다
신(神)들이 도망다녀요
세상 어둔 습지에서 늙는 짐승들과
알몸으로 뒹굴어요
신의 사랑, 짐승의 사랑으로
해골들의 입을 열죠
골 속의 텅 빈 어둠의 말을 하죠
어둠의 분말들이 일제히 흩어져 울리는
높푸른 종소리를 좇아 올라가요
아아, 지옥이 거기 있어요
무너져 아름다운 핏물을 뿌리며
빛덩이가 채찍처럼 일렁여요
내 몸의 어떤 상처를 당신에게 후려드릴까요?
비명도 절규도 잃어버린 당신들
목 메인 죄(罪)의 출구 같은
입술을 향하여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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