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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고구려사 왜곡 현장을 가다/ (상) 지안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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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고구려사 왜곡 현장을 가다/ (상) 지안시박물관

입력
2005.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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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중앙 및 지방정부 차원에서 고구려사를 왜곡하지 않겠다”는 중국 외교 당국의 구두 약속은 말 그대로 ‘립 서비스’에 지나지 않았다. 고구려의 옛 도읍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과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의 박물관이 고구려 역사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분석한다.

지난 해 고구려 유적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전후해 새 단장한 중국 지린성 지안시 박물관은 아침 일찍부터 관람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올 들어서만 1만5,000여 명. 중국 각지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많은 답사객들이 찾아든다.

이곳에서 답사 안내자나 박물관 직원의 설명을 들어보면 고구려는 영락없는 중국 역사다. 정문을 들어서면 천장까지 닿는 광개토대왕비 탁본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고구려의 강건하고 영화로웠던 시대를 증언하는 이 비문 복제품 앞에 1.5m 높이의 돌모양 표지판이 서 있다. 박물관 전체를 안내하는 ‘머리말(前言)’이다.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의 고대문명 발전과 탄생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중국 동북지방의 소수민족이며 지방정권 가운데 하나이다.’ 박물관은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임을 잘라 말한다.

좌우로 이어지는 유물 전시실 중 오른쪽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고구려 조공책봉 조견표’다. 고구려가 이른바 ‘중원’의 각국에 조공을 바치고 벼슬을 받았던 14차례 기록을 표로 만든 것이다. 표는 기원후 12년 유리왕 때 왕망(王莽)의 신정권에서 ‘고구려 왕의 이름을 하구려(下句麗)로 바꾸었다’로 시작, 624년 영류왕 때 당(唐)이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 고구려왕을 책봉했다’는 대목으로 이어진다.

중원이 어디인가? 청(淸) 이후에야 쓰기 시작한 ‘중국’이 중원인가? 지금의 중국이 2,000년 전의 고구려와 무슨 관계란 말인가? 고구려연구회장을 지낸 서길수 서경대 교수는 “고구려는 705년 동안 안정적으로 지속한 반면 ‘중국’에서는 그 동안 35개국이 이합집산했다”며 “당시 동아시아에서 조공과 책봉이란 지배, 피지배 관계가 아니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교류하는 외교 수단”이라고 말했다.

전시실에는 ‘고구려 유민 이주 상황’ 표도 내걸려 있다. 나라 멸망 뒤 고구려인 대부분이 중국 땅에 들어갔다는 기록을 사서(史書)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것이다.

당회요(唐會要)를 인용해 ‘당 정관(貞觀ㆍ당 태종의 연호) 19년(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친 뒤 요주, 개주, 암주 3주로 호구를 옮겨 중국에 들어간 자가 7만 명이었다’거나, 구당서(舊唐書) 고종기(高宗紀)의 ‘당 총장(總章) 2년(669년) 당이 고구려를 멸한 뒤 고구려의 2만8,200호를… 내지로 옮겼다’는 대목을 갖다 놓았다.

서 교수는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 인터넷 홈페이지도 ‘원래 고구려에는 인구 70여 만이 있었는데 멸망 후 절반 가까운 30만이 중원으로, 10만 정도는 신라로, 또 10만 정도는 발해로 옮겨가고 나머지는 전장에서 죽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70만 호를 잘못 계산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구 구성원을 5인으로 잡으면 멸망 당시 고구려 전체 인구는 350만 명. 중국의 주장대로 30만 명이 중원으로 갔다 해도 300만이 넘는 나머지의 행방은 해명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살던 그 자리에 남아 발해인이 됐다는 것이다.

특히 ‘고구려 역사 중요 기술’은 대표적인 역사 왜곡이다. 박물관 왼편 전시실에 있는 이 안내문은 한서, 후한서, 삼국지, 태왕비, 위서 등을 인용해 ‘고구려는 한나라가 세운 현도에서 일어났으므로 중국 역사’라고 주장한다.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있었기 때문에 자칫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서 교수는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다’고 하여 고구려가 나라를 세운 지역은 한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부여 영역에 편입된 것으로 돼 있다”며 “쑨진지 등 중국의 고구려사 전문가들도 한의 고구려와 주몽의 고구려를 명확히 구분한다”고 지적했다.

지안=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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