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재 '모두들, 괜찮아요'- 전직 춤꾼 빈틈많은 노인역, 꼬장꼬장한 기존 역할 벗어이대근 '이대근, 이댁은'- 마초적 이미지 꺾인 소시민 "에로스2 이후 9년만이야"오현경 '혈의누'- 60대 나이 불구 밤샘 촬영, 꼿꼿한 사대부 연기도 호평
‘배우에게 마침표는 없다. 다만 쉼표만 있을 뿐이다.’
이순재(70) 오현경(69) 이대근(62) 등 노장 배우들이 충무로로 돌아오고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유행어도 있지만, 세월의 무게까지 얹혀진 이들의 경륜은 무시할 수 없다. 잠깐 얼굴을 비추는 것 만으로도 영화에 중량감을 실어준다는 점에서 이들의 스크린 복귀는 반갑다.
녹슬지 않은 노장의 경륜
이순재는 이번 주말 촬영을 마치는 ‘모두들, 괜찮아요’(감독 남선호)에 출연 중이다. 이미례 감독의 ‘물망초’(1987)이후 18년 만의 스크린 나들이다. TV드라마에서 꼬장꼬장한 집안어른 역을 주로 맡던 것과는 달리, 춤꾼으로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치매에 걸려 막내 딸(김호정) 집에 얹혀 사는, 빈틈 많은 노인 원조 역이다.
35회 촬영 분량 중 30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주연급이다. ‘토지’에서 함께 일했던 김유석의 권유로 출연을 결정했다고 하지만 반드시 그런 인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드라마 ‘어여쁜 당신’,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와 추석 특집극 등으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상황에서도 그는 17일 촬영에 들어간 송혜교 차태현 주연의 ‘파랑주의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사랑의 의미를 깨우쳐 주는 장의사 노인 만금 역으로 역시 상당한 극중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형 마초의 상징인 이대근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이대근, 이댁은’(심광진 감독)에서 주연을 맡았다. 극장에 걸리지 못한 ‘만날 때까지’(1999)를 제외하면 ‘에로스2’ (1996)이후 9년 만의 주연이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쓸쓸히 노년을 보내는 도장가게 주인을 연기한다. 극단 차이무의 ‘행복한 가족’이 원작이다.
시나리오를 직접 쓴 심 감독은 “남성적 이미지가 꺾인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싶어 출연을 부탁 드렸는데, 눈이 충혈될 정도로 시나리오를 정독한 후 출연을 승낙하셨다”고 전했다.
한때 세상을 떠났다는 낭설이 퍼질 정도로 두문불출해온 오현경도 5월 개봉한 ‘혈의누’의 김치성 대감역으로 6년 만에 영화 팬들을 만났다.
이 영화에서 그는 수사관 원규(차승원)와 대립각을 세우는 꼿꼿한 사대부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밤샘 촬영 때도 한치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사위 이영은 감독의 ‘이대로, 죽을 순 없다’에도 아내 윤소정, 딸 오지혜와 함께 특별 출연했다.
충무로의 새로운 활력소
이들의 복귀는 최근 충무로의 새로운 활력소로 급부상하고 있는 다른 노장배우들의 활약에 고무된 바 크다. 같은 연배의 신구(69) 변희봉(63) 등이 ‘박수칠 때 떠나라’ ‘공공의 적2’ 등 화제작에 잇달아 출연, 간단치 않은 힘을 보여주었다.
최근 노장배우의 파워를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은 ‘마파도’. 이 영화는 김을동 여운계 김형자 김수미 등의 감칠맛 나는 연기에 힘입어 이렇다 할 젊은 스타 없이도 거뜬하게 3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제작사 싸이더스FnH의 조윤미 실장은 “노장 배우들은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 같은 역할을 한다.
‘혈의누’도 오현경씨가 없었다면 이야기 진행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고, 심광진 감독도 “이들 노장배우는 경지에 오른 연기력과 젊은 배우 못지않은 열정으로 여전히 충분한 관객 설득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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