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내내 지상파 방송 3사는 불볕더위보다 더 뜨거운 논란 속에 허덕거렸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과 모처럼 짬을 낸 어른들이 산과 바다로 나가 더위를 식히며 심신을 달래는 동안, 이들의 친구이자 선생님인 텔레비전은 더위를 먹고 휘청거린 걸까. 모두 나열하기 어려울 만큼 2005년 여름은 방송 ‘사고’의 연속이었고, 이는 어느 한 방송사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
연초에 이미 ‘구찌 핸드백’ 사건으로 홍역을 치른 MBC는 생방송인 ‘음악캠프’에서의 성기노출 사건으로 한국방송사에 한 ‘획’을 긋더니 중국영화 장면을 자신들이 ‘단독입수한 일본군 생체실험 영상자료’라며 ‘뉴스데스크’를 통해 내보냈다가 사과방송을 해야 했다.
최근에는 해외송출업체 브로커가 MBC 간부들을 상대로 금품과 향응을 제공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 다시 사장 명의의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KBS는 시트콤 ‘올드미스 다이어리’에서 며느리가 시어머니 뺨을 때린 장면을 내보내 방송위원회의 징계를 받았고, 간부 및 PD들이 드라마 외주제작사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신문보도로 홍역을 앓고 있다.
또한, 사내 감사자료가 반복적으로 유출되어 내홍까지 겪고 있다. SBS는 ‘루루공주’에서 캐디를 비하하는 장면을 내보내 지탄을 받더니 사우디와의 월드컵 예선전을 중계하면서는 어설픈 ‘방송사고’를 내서 네티즌들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물론 이 모든 사건들이 같은 성격도 아니고 이들을 묶어 한 마디로 단정할 수도 없다. 특히, ‘음악캠프’는 치기 어린 출연자에게 테러를 당한 피해자이고 ‘올드미스 다이어리’는 기획의도가 무시된 채 마녀사냥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평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향응과 관련된 사건들 역시 그저 ‘관례적’이었음을 하소연하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사건들의 핵심에는 공통점이 있다. 안이함이다. ‘관례적’ 안이함이고 ‘관습적’ 비전문성이다. 출연자가 갑자기 성기를 드러낸 것은 예기치 못한 사건이었으나, 계속 카메라를 비추던 카메라맨과 주조정실에 멍하니 앉아 화면 바꿀 생각을 못한 PD 이하 스태프들은 생방송의 긴장을 잊고 있었다.
선수 하나가 퇴장 당한 것도 모른 채 10분 가까이 중계를 계속하다가 뻔뻔스럽게 사과 한마디 안 한 아나운서와 해설자, 그리고 즉각적으로 사인 하나 넣지 못한 중계 스태프들은 안이함의 극치였다. ‘단독 입수’에만 흥분하여 자료의 출처조차 챙기지 않고 ‘마루타’ 영상을 내보낸 것은 스스로가 전문 저널리스트가 아닌 시청률 장사꾼이라고 자백한 꼴이다.
사회적 지탄을 받을 여지가 상당한 설정을 기획대로 밀고 나간 드라마 제작팀 역시 용감할지언정 안이했다. 술 몇 번 얻어먹고 명절 때 선물 좀 받은 것이 뭐 그리 잘못이냐는 방송사 간부들의 안이함 또한 말해 무엇하겠는가.
방송의 일선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하리만큼 안이하다. 2005년 현재 대한민국 방송사의 현실이다. 최상위 엘리트들을 선발하여 최고 수준의 보수를 주는데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가? 한 두 명의 실수가 아니라 ‘집단적’이고 ‘관례적’인 안이함이기에, 이 문제는 심각한 구조적 병폐이다.
전문가로서의 능력과 윤리의식과 프라이드 대신 잔기술과 적당함과 자만을 가르치는 조직문화가 아니라면 안이함이 이렇게까지 관습화될 수는 없다. 개혁을 외치며 등장한 방송 3사의 사장들은 도대체 무슨 개혁을 얼마만큼 하고 있는가?
광고수익 증대안에 골몰하거나 거듭되는 사과문 문안에 고민하기 이전에 제작 일선 종사자들을 신뢰할 수 있는 ‘전문인’으로 만드는 연구를 해야 하지 않을까? 긴장을 풀지 않는, 안이하지 않는 전문인 말이다. 방송사의 가장 큰 자산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방송사들이 그저 잠시 더위를 먹은 것이라면 좋으련만. 이제 더위가 가고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방송사들도 2005년 무더웠던 여름의 악몽에서 벗어나 시원한 새 출발을 해주기 바란다.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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