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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하는 김영성 관훈클럽 사무국장/ 반평생 뒷바라지 '언론계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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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하는 김영성 관훈클럽 사무국장/ 반평생 뒷바라지 '언론계 산증인'

입력
2005.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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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협회 20년, 관훈클럽 20년. 우리나라의 대표적 언론단체 두 곳에서 무려 40년이나 살림을 꾸려온 김영성(金永盛ㆍ66) 관훈클럽 및 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사무국장이 31일 퇴직한다. 언론계의 산 증인으로 감회가 남다를 법도 한데 “기자들이 다 했고 나는 뒷바라지만 했다”며 굳이 말을 아꼈다.

그 자리에 따로 정년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 할 수도 있었다. “칠순이 다 됐는데 더 있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일을 맡아야 능률도 올라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좋은 분들과 헤어지는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그는 기자였던 친형의 권유로 1964년 기협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협회는 기자들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렸지요. 언론사 사주에게 무급기자 없애고 월급도 면세점 이상 주라고 요구했지요. 참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70년대는 격동의 시기였다. 74년에는 동아투위 사건 등 한국언론의 실상을 담은 보고서를 국제언론인협회(IPI)에 내려다 회장단이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 때 저도 불려갔습니다. 강요에 의해 사표를 썼는데 김병익 당시 기협회장이 저를 변호하자 수사관이 사표를 찢고 없었던 일로 하더군요. ”

80년에는 계엄사 검열 철폐 운동으로 하다가 김태홍 회장 등 기협 회장단이 구속되고 1,000명 가까운 회원들이 해직되는 일이 일어났다. 당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역시 김병익 현 문화예술위원장이다. ‘우리를 이상주의자라고 비웃어도 좋다. 그래도 우리는 이상주의를 지향한다’는 그의 기협회장 취임사도 감동적이었단다.

85년에는 중견 언론인 모임 관훈클럽으로 옮겼다. “관훈클럽요? 좋은 곳입니다. 언론사간 경쟁심이나 견해 차이를 회원 사이에서는 찾기 힘듭니다. 언론발전을 위해선 다들 힘을 모으기 때문이지요.”

그는 책자 발행, 저술 지원 등 관훈클럽 업무 가운데서도 토론회에 큰 의미를 두었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이뤄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 토론회는 반향이 특히 컸다.

퇴직은 하지만 연말까지는 관훈클럽 일을 도울 생각이다. 그 뒤에는 어떤 일을 할 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글=박광희기자 khpark@hk.co.kr

사진=최흥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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