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현지에서의 유명세에 비해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우리나라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가이다. ‘상대적’이란 표현을 쓴 건 두 가지 의미다.
첫 번째는 현존하는 다른 프랑스 작가들과 비교(그는 1948년 생이다)했을 때 국내에서의 지명도가 낮다는 뜻이고, 두 번째는 국내 발간된 저작물의 수에 비해 그의 작품을 읽은 국내 독자가 많지 않다는 뜻이다.
1994년 산문집 ‘출생파업’(용경식 옮김, 하서출판사)이 출간된 이후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그의 책은 모두 여섯 권이다. ‘영원한 황홀’(김웅권 옮김, 동문선) ‘순진함의 유혹’(김웅권 옮김, 동문선), 그리고 2003년에 나온 ‘번영의 비참’(이창실 옮김, 동문선) 등은 산문집이고 ‘아름다움을 훔치다’(김운비 옮김, 문학동네)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임’(김남주 옮김, 작가정신)은 소설이다.
이 중 ‘아름다움을 훔치다’는 파스칼 브뤼크네르에게 르노도상을 안겨주었고 ‘순진함의 유혹’으로는 매디치상 에세이 부문을 수상하였다. 내가 언급하려는 것도 바로 이 두 권의 책이다.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독특한 시선과 미적 취향이 이 두 작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선, ‘순진함의 유혹’에서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개인은 자신의 가능한 모든 역할들 가운데 단 하나의 역할만을 간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불평하고 애처롭게 앙탈하는 유아의 역할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탈없이 허약한 어린아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대 받은 자의 코미디를 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다.
이 대가는 생명력이 저하되는 것이고, 힘이 쇠약해지는 것이며, 의지가 빈곤한 상태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서양에는 분명히 옹졸하고 허약한 새로운 인간 모델이 산출되고 있다.” 파스칼 브뤼크네르, ‘순진함의 유혹’에서
이 책에서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주장하는 핵심은 현대소비사회에서 ‘자기 운명의 지배자이며 창조자로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어려운 것인 만큼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덕목이다. 그러나 현대소비사회는 개인의 이러한 역량을 퇴행시켜 개인을 응석받이 어린아이로 만들어버린다.
그랬을 때 개인은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문제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스스로를 박해 받은 자라고 생각하게 된다.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그러한 현대인의 행동양태를 ‘유년기적 행동 경향’과 ‘희생화 경향’이라는 두 가지 계락으로 설명한다.
‘유년기적 행동 경향’은 어린아이의 속성과 특권을 성년이 된 이후까지 이전시키는 것을 뜻한다. 어린아이는 개인화된 서구의 가정 구조에서 언제나 보호와 숭배의 대상이 되는 ‘작은 신’이다.
성인들은 어린아이의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지는 동시에, 어린아이를 티 없이 청결한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떠받들기도 한다. 그러한 보호체계 속에서 어린아이는 스스로의 안전과 끝없는 탐욕을 타인에 의해 성취하는 기술과 습성을 터득하게 된다. 그러한 성인들이 ‘개인’의 이름으로 단자화되어 가면서 온갖 분쟁과 핍박의 단초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 인류를 지배하는 집단무의식적 경향을 갖는다는 게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논지이다. ‘희생화 경향’은 그것이 더욱 전면적인 양태로 드러나는 경우이다.
‘희생화 경향’은 한 마디로 자신을 희생자라 여기는 경향이다. 이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서구 식민주의 시대가 종결되면서 발생한 모든 문제들을 피지배자였던 제3세계 국가의 탓으로 전가하는 정치적 목적과 결부되기도 한다.
요컨대 현대 서구 사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들을 교묘하게 전이된 책임론으로 왜곡하며 스스로의 불행을 역설적으로 선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는 최근 전범 문제와 관련된 일본의 태도를 보면 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제국주의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은 ‘동양 속의 서구’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파스칼 브뤼크네르가 말하는 ‘순진함(innocence)’은 이 두 가지 계략이 맞물린 집단적인 문화적 퇴행현상을 일컫는다.
자신의 고통을 호소함으로써 안전과 쾌락을 동시에 보상 받는 이러한 문화는 결과적으로 모든 육체적 정신적 불편을 약으로 해소하려는 성향으로 이어져 궁극적으로 발현되어야 할 에너지와 경쾌하고 즐거운 문화의 약진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게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진단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니체와 루소의 21세기 형 적자라 할 수 있다.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방대한 철학적 정치적 식견과 문화적 안목을 지녔지만 결코 어렵거나 난삽하게 읽히지 않는다. 매우 현란한 수사와 맺힘 없는 논리가 유장한 그의 에세이들은 정치한 산문적 법칙과 냉철한 자기인식에 바탕한 프랑스 산문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철학적 원리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이나 난해한 각주 없이 한 편의 흥미진진한 다큐멘터리처럼 흘러가는 그의 글들은 내면화한 정보체계와 사유의 힘만으로 밀고 가는 맛깔스러운 산문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다소 문제가 있다면 들쭉날쭉한 번역을 들 수 있을 텐데, 읽다 보면 전혀 퇴고를 거치지 않은 초벌번역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건 딱히 불어를 모르더라도 문장의 구성과 의미의 숨겨진 맥을 판독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법할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된 소설 두 권은 상대적으로 훨씬 말끔하다는 인상이다.
‘새 삶을 꿈꾸는 식인귀들의 모험’은 일종의 우화집이다. 156페이지 분량의 이 작은 책은 ‘아이를 먹는 식인귀’와 ‘아이를 지우는 화학자’라는 두 기괴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대칭시킨 형식으로 쓰여졌는데 두 주인공을 각각 ‘유년기적 행동 경향’과 ‘희생화 경향’에 대한 미적 알레고리로 읽는 것도 재미있다.
그랬을 때, ‘식인귀’와 ‘화학자’는 인류를 현재사회가 지니고 있는 반문화적 병리현상의 은유로 읽힌다. 그러나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이러한 생각이 보다 뛰어난 미적 감각으로 발현된 작품은 ‘아름다움을 훔치다’이다.
염세적 성향을 지닌 표절작가 벵자멩과 아름다운 여인 헬렌은 우연히 폭설에 갇혔다가 늙은 변호사 슈타이너와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은거하는 외딴 산장을 방문하게 된다.
난장이 하인 레몽와 더불어 오랫동안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살아온 이들 부부는 모든 아름다운 인간에 대한 혐오와 애증을 간직한 채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려는 음모를 품고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납치하여 그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까지 감금하는 엽기적인 살육제를 벌인다. 일명 ‘건초장’이라 불리는 그곳은 말 그대로 아름다움의 진액들이 말라붙어 흉물스런 잔해들만 나부끼는 폐허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슈타이너 일당은 세상을 향해 공멸행위에 가까운 잔악성을 드러낸다.
슈타이너 일당은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아름다운 여성의 신체에서 흘러나오는 청춘의 숨결이다. 그들은 여성들을 감금한 방과 연결된 관을 통해 그녀들의 숨결을 흡입한다.
‘청춘의 흡입구’라 명명된 이 괴이한 욕망의 도구는 이들의 피해의식과 세상에 대한 적대의식이 결국엔 세상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의 허구성에 스스로 함몰된 결과라는 걸 역설적으로 방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름다움을 파괴시켜 아름다움의 엑기스를 탐식하는 건 결국 좌절된 욕망을 타인의 죽음으로 보상 받으려는 정서적 퇴행의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작품은 한 악마적 인물의 초상을 통해 악마를 양산하는 세계의 궁극적 마성을 파헤치는 이중의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더불어 허구적으로 조작된 아름다움에 대한 편견과 관념을 해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런 점에서 화자 벵자멩이 표절작가라는 사실도 의미 깊게 짚어볼 만한 사항이다.
아름다움은 그 독보적인 위력을 바탕으로 수 많은 기생자와 희생자를 낳는다. 그것은 ‘순진함’에 빠져버린 자들의 완결되지 않는 쾌락과 자기방어를 위해 가설된 일종의 ‘인공낙원’이다.
그 ‘인공낙원’이 요구하는 조건들은 결국 개인의 열정과 창조적 의지를 제한하고 관리하는 집단적 환각의 요람으로 작용한다. 그 ‘모래의 성’ 같은 요람에서 개인은 점점 왜소해지고 나약해지다가 종국에는 다른 아이의 장난감 하나에 모든 걸 낭비하는 문명 이전의 야만인으로 퇴화하게 된다.
그렇듯 현재의 세계는 요람 속의 아이들을 달래고 젖을 물리며 나른한 안정감 속에 가둔 채 헛된 위안을 주는 것으로 모든 시스템을 일률적으로 작동케 한다. 잠든 아이의 눈 앞엔 영원한 안정과 쾌락을 암시하는, 아름다우나 영원히 살을 비빌 수는 없는 가상의 어머니가 놓여 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생명을 주는 게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의 생명을 갉아먹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우리가 잘 깨닫지 못하는 그 허구의 어머니를 보게 하는 동시에, 그것을 스스로 걷어내라 말한다. 그런 점에서 저항은 아직도 유효한 예술적 행위의 본질이라 말해도 결코 과언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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