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가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 전쟁”이라는 강정구 동국대 교수의 발언을 가지고 서울경찰청에서 사법처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강 교수의 말을 듣고 나는 바로 ‘월간조선’ 전 사장 조갑제씨의 발언을 떠올렸다. 둘의 주장은 어법이나 논조가 너무 비슷하다. 그런데 하나는 처벌의 대상이 되고, 다른 하나는 우국의 충정이 된다. 왜 그럴까?
강 교수의 말을 들어 보자. “6ㆍ25는 후삼국 시대 견훤과 궁예, 왕건 등이 삼국 통일을 위해 서로 전쟁을 했듯이 북한 지도부가 시도한 통일 전쟁이었다.” 여기서 ‘통일 전쟁’이라는 말은 기술적(descriptive) 표현인지, 평가적(evaluative) 표현인지 분명하지 않다. 전자라면 6ㆍ25의 목표가 통일이었다는 뻔한 얘기, 후자라면 6ㆍ25도 나름대로는 훗날에 민족사의 완성을 위한 노력으로 평가받을 것이라는 뜻이리라.
조갑제씨의 발언에는 이런 애매함이 없다. “한국 역사상 통일을 위해서 전쟁을 결심했던 사람으로 두 김씨가 있으니 김유신과 김일성이다.” “두 사람은 통일을 위한 전쟁을 결심했던 한국 역사상 유이한 지도자다.” 여기서 김일성은 분명히 김유신과 같은 반열에 놓여 고무, 찬양되고 있다. 왜 우익 인사가 6ㆍ25를 찬양하는 걸까?
1990년대 초 현실 사회주의 붕괴로 북한이 심각한 체제 위기를 맞았을 때, 한국의 우익들은 북한 정권의 붕괴가 임박했고, 통일의 호기를 놓치지 말고 유사시에는 전쟁을 통해 분단을 깨끗이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김일성도 한 통일 전쟁의 결심을, 왜 대한민국은 하지 못하느냐’고 재촉하는 맥락에서 느닷없이 김일성의 전쟁 결심에 대한 찬양이 나온 것이다.
원래 이 문제는 맥아더 동상을 둘러싼 논쟁의 와중에 강 교수가 맥아더의 역할을 재평가하는 가운데에 불거진 것이다. 당시 조갑제씨는 만약 미국이 북한에 대한 선제 공격에 반대하면 “주인의 발이라도 물라”며, 북침 전쟁을 위한 반미 선동까지 한 바 있다.
강정구 교수와 조갑제씨의 공통점은 ‘통일’이라는 지고의 가치 아래 다른 가치들을 상대화한다는 데에 있다. 강 교수의 주장에는 ‘민족 통일’이라는 대의 아래 남침의 범죄성을 상대화하는 수정주의의 경향이 엿보인다.
반면 조갑제씨의 것은 ‘국토 통일’을 위해서라면 미국의 발이라도 물어가며 북침 전쟁도 무릅쓰자는 노골적인 전쟁 선동이다.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위험할까?
이번 사건은 국가보안법이 그 동안 간첩 잡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무슨 일을 해 왔는지 잘 보여준다. 또 ‘국가 안보’라는 개념이 그 동안 얼마나 우익적으로 오용되어 왔는지도 보여준다. 6ㆍ25에 대한 평가도 ‘전쟁을 결심하자’는 선동일 경우에는 법에 저촉되지 않고, 노골적인 반미 선동도 ‘북침을 하자’는 맥락에서 할 경우에는 애국의 충정이 된다. 얼마나 우스운가?
강정구 교수의 것은 한 학자의 ‘학적 신념’의 표현이다. 거기서 고무, 찬양의 의도는 읽혀지지 않는다. 반면 조씨의 것은 한 우익 인사의 ‘이념적 선동’이다. 여기에는 고무, 찬양의 의도가 분명하다. 게다가 강 교수의 발언이 역사학적 ‘논쟁을 촉구’하고 있다면, 조갑제씨의 것은 국민을 참화 속에 몰아넣고 국토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전쟁을 촉구’하고 있다.
‘안보’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안보를 위해 처벌할 것은 정작 어느 쪽이어야 할까?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ㆍ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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