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결혼하지 않은 이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에게 경서를 배우고,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는 군졸과 어린 아이들까지도 향선생(鄕先生)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중국 송나라 관리 서긍(徐兢ㆍ1091~1153)은 1123년 예종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 고려에 왔다가 공부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고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때도 우리의 교육열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서긍은 한달 남짓 개성에 머물며 고려의 제도, 풍속, 생활상 등을 관찰하고 그림을 덧붙여 황제에게 바쳤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이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고려 관련 서적들이 조선 때 출판된 것과 달리, ‘고려도경’은 고려의 문화를 당대에 소개했다.
고전 국역 단체인 민족문화추진회가 바로 그 ‘고려도경’을 번역했다. 서해문집의 고전 번역 시리즈 ‘오래된 책방’의 열번째 책이다.
‘고려도경’은 고려의 건국과 왕실의 계보, 마을, 인물, 의식용 물품, 병기, 그릇, 풍속, 수레와 말, 여자들의 의상 등 내용이 다양하다. 공부와 관련해서는 “선비를 귀하게 여기므로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기록했다. 혼인, 장례에 대한 풍속은 이렇다. “귀인이나 선비 집안에서는 혼인할 때 예물을 쓰나 백성들은 술이나 쌀을 주고받을 뿐이다. 부유한 집안에서는 아내를 서너 명이나 맞이 하지만 조금만 맞지 않아도 바로 이혼한다…죽어 염할 때 관에 넣지 않는다. 왕이나 귀족들도 그러하니 장사 지내는 기구가 없는 가난한 사람은 들 가운데 시체를 버려두어 봉분도 만들지 않고…”
서긍의 기록에 따르면 여자가 등에 아이를 업고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풍경은 당시에도 있었다. 고려는 공예를 숭상했고 기술자 중 뛰어난 자를 장작감(將作監) 등에서 일하게 했는데 이들의 수입과 사회적 지위가 농민보다 훨씬 높았다. 고려인은 깨끗해서 목욕을 자주 하고 중국인은 때가 많다고 비웃기도 했다.
“오랑캐 풍속을 다 고치지 못했다. 관혼상제를 따르는 것이 적고…부인들이 땋은 머리를 아래로 내려뜨리는 것에는 변발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대목을 보면 송의 관리로서 그 역시 중화주의에 젖어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고려의 모습이 더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개성 관광을 계기로 고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데 그 같은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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