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한일회담의 시작부터 끝까지 깊숙이 개입했다.
미국은 한일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강력히 희망했다. 미국은 당시 소련의 남하와 중공의 등장으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한일 양국이 구원을 털고 결속, 동북아 반공전선의 교두보가 돼 주길 바랐던 것이다.
26일 공개된 한일협정 문서에 따르면 한일회담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10월20일 연합군최고사령부(SCAP)의 중재 하에 도쿄에서 열린 회의가 모태가 됐다. 연합군이 미국 지휘아래 있던 만큼 미국의 요구에 따라 한일회담이 시작된 셈이다.
1차~3차 회담까진 미국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 협정 문서에 미국의 입김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초반부터이다. 1961년 10월 라이샤워 주일 미국대사는 “일본이 어느 정도의 금액을 내놓을지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발언한 것으로 돼 있다.
미국의 영향력은 다음해 9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이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나타난다. 박 의장은 “한일 국교 정상화 문제에 귀하가 특별한 관심을 갖고 교섭을 주지하고 계신데 대해 김은 경의를 표한다.
회담이 교착된 원인은 일본이 회담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라고 미국의 지원을 요구했다. 1963년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은 방미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한일 국교 정상화는 극동 안정에 막대한 공한을 할 것”이라고 한일 수교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1964년 문서에선 다급해진 미국의 모습이 확인된다. 라이샤워 대사는 그 해 7월 “회담 조기타결이 어려우면 주한 일본대표부를 설치해 사실상 관계를 정상화하는 게 어떻겠냐”고 주일 한국대사에게 타진했다. 한달 뒤 이동원 외무장관과 주한 미국대사는 “미국은 한일간 현안의 조기 타결을 위해 가능한 지원을 하겠다”는 공동성명을 냈다.
협정이 타결된 해인 1965년 3월과 4월 문서엔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일본이 더 양보해야 한다는 우리측 주장을 납득하고 적절한 협조를 언약한다”, “번디 미 국무부 차관보는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 방미 전에 조인을 실현하기를 희구하며, 이 같은 중대한 계기가 없으면 (대한 장기 원조에 대해) 미 의회를 납득시키기 어렵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최문선 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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