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일제 치하의 경찰서 입구에는 항상 붉은 등이 걸려있었다. 그 붉은 등은 일본 순사처럼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양심’을 가지고 사는 모든 조선 사람에게는 ‘압박’으로 느껴졌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일본이 2차 대전 준비를 체계적으로 펼쳐나가고 있을 때였다. 조선말살이라는 식민지 정책을 구체화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일본의 압력이 그대로 느껴졌다. 당시 내가 다니던 휘문중학교가 자리잡았던 원서동 길을 오르자면 늘 그 붉은 등 아래를 지나야 했다. 일본 순사들은 학생들을 불러 세우고는 복장검사나 소지품 검사를 하기도 했다. 공연히 불러 세워서 트집을 잡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붉은 등이 보이는 곳은 어서 지나치고 싶은데 뛰어서 빨리 지나가자니 공연히 일본 순사의 눈에 띌 것만 같아서 뛸 수는 없었다. 어린 마음에 유독 빨리 걷느라 해방이 된 후에도 빨리 걷는 버릇이 오랫동안 없어지질 않았다.
어린 시절, 붉은 등의 기억은 가슴 깊이 남아있었고 그래서 훗날 내 호는 늘 푸르름을 상징하는 ‘파른’이 되었다. 원서동 근처에서 보낸 학창 시절은 조선의 서러움을 가슴 깊이 새긴 시절이었으나 동시에 희망을 꿈꾸던 시기였다.
당시 휘문중학교의 선생님들은 제자들에게 우리 스스로 조선, 곧 한국을 되찾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마음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셨다. 독립운동가이신 김도태 선생님은 지리를 가르치셨는데 우리나라의 명승지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면서 한국의 훌륭한 전통을 일러주셨다. 국어를 가르치신 이승규 선생님은 부여분이셨는데 부여의 고시가까지 줄줄 읊으며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셨다. 국어를 가르치신 이태준 선생님이나 영어를 가르친 정지용 선생님 등 모두 열과 성의를 다해 학생들에게 조선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주셨다.
공부하는 학생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당시 휘문중학교에는 역기 씨름 유도 등 운동부가 있어서 운동을 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선생님들은 한국인의 체력이 좋지 않으면 식민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면서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나라를 위해 해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셨다. 중학교 3학년때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정책이 본격화하면서 한국어 과목은 사라졌지만 선생님들의 수업을 통해 우리는 우리 말과 우리 문화에 대해 긍지를 간직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3학년 때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에도 금강산의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일본에 빼앗겼다는 서러움 때문에 학생은 물론 스승님까지도 잠을 못 이루었다. 유난히도 몸이 허약했던 친구 하나를 서로 번갈아서 업고 금강산 산등성이를 나흘간 오르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중학생이면 열 다섯에서 열 일곱이 되는 나이였으나 조선을 되찾아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우리들은 대부분 일찌감치 책임감을 느낄 수 있는 젊은이가 되었다.
그때 젊은이들이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잃어가는 것을 걱정하고 역사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할 해답을 찾고자 ‘화랑’ 연구를 시작했다. 곧이어 조선이 왜 이러한 수모를 당해야 하였는지를 묻게 되면서 조선시대 정부구조를 연구하였다.
소년기에 체험한 일제 강점의 뼈아픈 기억은 ‘비양심’과 ‘압박’에 대한 저항을 되뇌이게 하였다. 나라를 되찾는 법 뿐 아니라 양심의 실천이 가능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밑거름이 되는 원칙을 우리 역사 속에서 찾기 위하여 어린 나이에 역사공부를 시작했다.
1940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면서 만나게 된 두 분 스승, 손진태 선생님과 이인영 선생님은 내게 한국사의 진면목을 일러주셨다. 당시 일제는 한국인이 자부심을 느낄만한 역사는 가르치지 않는 것은 물론 기록에서도 삭제하려고 했는데 두 분 선생님은 이런 역사를 찾아내어 널리 알리려고 애를 쓰셨다. 손진태 선생님은 내가 연희전문에 입학하던 첫 해만 가르치시고 보성전문학교의 사서로 쫓기다시피 떠나셨지만 이어 오신 이인영 선생님은 손진태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거대한 강역이나 우리 활자의 우수함에 대해서 상세히 가르쳐주셨다. 두 분 선생님께는 해방후 서울대 문리대 국사학과에 진학하여 다시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그 때 이인영 선생님과 국사학과 학생들이 함께 만든 ‘조선사 연구’라는 책은 한국사를 제대로 일러주는 최초의 교재였다. 또 이 때 홍기문 선생님으로부터 강의를 들으면서 조선왕조실록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좌사관과 우사관이 동시에 사초를 작성하는데 왕의 표정과 행동까지 기록하였다. 양심을 따라 진실되게 역사를 기록하여 겨레의 번영을 위해 참고하게 하자는 것이 실록의 정신이라는 것을 배웠다. 조선에 대해 연구하면 할수록 조선의 정부 구조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백성을 존중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훌륭한 제도가 있더라도 그 제도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양심이 기본이 되는 실천이 없으면 합리, 과학, 민주의 기본이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그러나 한국사를 바르게 연구하는 것이 힘들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천황제보다 앞선 유물이 한반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 한반도에 구석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왔다. 그런 오류는 해방 이후에도 영향을 미쳐 내가 1960년대에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할 때에 정부마저 유물 발굴을 강경하게 반대할 정도였다. 그 같은 반대를 뚫고 발굴 허가를 받아내고 발굴 작업을 한 결과 한반도의 역사를 수십만년 앞당기는 유물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반면 일본은 외국에서 들여온 구석기 유물을 묻어놓고 다시 파내는 방식으로 마치 70만년전의 역사가 있는양 조작을 했다가 2000년에 사기극의 진상이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외국의 고고학자들을 현장으로 초빙, 구석기 유적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나 현장의 유물이 프랑스 석기와 재질이 흡사한 점, 타제석기는 있으나 동물 뼈나 이가 발견되지 않은 점을 지적한 손보기 교수에 의해 사기극이라는 의문이 처음 제기됐다. – 편집자 주)
일제의 영향은 용어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말은 정신이기 때문에 용어를 일본식으로 하고 있는 한 진정한 학문발전은 없다는 생각에서 구석기 연구를 하면서 유물에 우리말 용어를 붙이기 시작했다. 타제석기는 뗀석기로, 마제석기는 간석기로 고쳤으며 찍개와 긁개, 주먹도끼 등 누구나 알아듣는 말로 학술용어를 바로잡았다. 또 라틴어와 영어, 일어 잔재가 남아있는 의학용어 해부용어도 한국말로 고치게 했는데 우리의 역사와 전통, 일상생활 속에서 쓰이는 말에서 학문이 비롯되어야 진정한 발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어떤 연구든 감정적인 연구가 아니라 과학적 연구방법을 토대로 역사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을 가장 중시했다. 이를 위해 지질학 환경학 생물학 유전학 분자생물학 금속학을 하는 학자분들과 협력을 했고 그 결과 역사적 자랑거리를 더욱 분명하게 밝혀낼 수 있었다. 금속공학을 하는 학자분들 덕에 우리의 금속활자에 오늘날에도 합금이 어려운 아연이 섞여있음을 발견했고 이것은 일본이 훔쳐간 조선 옥새를 되찾아오는 근거가 되었다. 금속활자의 발명연대가 당시 알려진 것보다 70여년 앞선 1160년대라고 밝힌 것도 과학분야 학자들의 협력 덕분이었다.
정직한 우리 역사를 통하여 ‘양심’을 기반으로한 ‘가치관’이 서있는 사회를 이루는 것이 일본이나 다른 외세로부터 진정으로 해방되는 것이었고 우리 젊은이로서의 책임이었다.
확고한 가치관이 서있지 않을 경우 ‘지식’을 얻어도 자신의 생각을 뚜렷하게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나는 과학적 연구방법을 이용하여 우리 역사를 왜곡의 여지가 없도록 밝혀 일본의 왜곡을 자연스럽게 방지할 것을 주장한다.
명확하게 밝혀진 역사를 바탕으로 반성할 부분과 자랑할 부분을 직시하게 될 때 우리 민족에 대해 감정적인 자긍심이 아닌 진정한 자긍심이 생겨난다. 이러한 자긍심이 있는 사회가 바로 진정한 공동체이다. 지식이 상대화한 오늘, 가정 학교 그리고 사회 전체가 양심의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 이는 우리 모두가 일종의 교육자의 역할을 해낼 의무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서로에게 교육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자면 항상 배우는 입장이 되어있어야 한다.
그른 것, 열등한 것은 가치가 없다거나 멸종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하다. 어떤 사회 또는 공동체가 발전하는 과정 속에는 열등한 것 그른 것 모두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므로 그것을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과정 자체를 없애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공부는 가장 기본이 되는 양심의 선언이라는 생각으로 평생을 해왔다.
●손보기 선생은…
공주 석장리 구석기 유적 발굴을 통해 한반도의 역사를 구석기 시대까지 끌어올린 선사고고학자이자 인쇄문화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기고 독립운동사를 비롯한 근현대사 분야에서도 많은 연구성과를 낸 사학자이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휘문중학교와 연희전문 문과를 거쳐 서울대 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63년부터 87년까지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퇴임후 한국선사문화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연세대 용재석좌교수, 단국대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그가 발굴한 석장리 구석기 유적지에 정부가 내년 4월 완공을 목표로 건설중인 ‘석장리 선사유적 박물관’ 명예관장으로 지금도 매주 현장을 찾아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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