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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사북 노동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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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사북 노동항쟁

입력
2005.08.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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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증오의 투석이다/거리엔 집단적인 돌들이 깔려 있었다/투구와 방패가 번쩍이고/노동의 기쁨 모르는/어두운 손들이 돌을 쥐던 낮/…/돌들만이 고요한 광산촌/거리엔 석기시대의 어둠이 깔려 있었다” 시인 최승호는 사북초등학교 교사시절 목격한 장면을 ‘사북,1980년 4월’에 생생히 담았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는 84년 “긴급하다는 한 가지 생각”으로 사북으로 카메라를 들고 달려가 사진산문집 ‘침묵의 뿌리’를 냈다.

탄가루가 뒤범벅된 광부의 얼굴과 사택 앞에서 해맑게 웃는 소녀, 금간 학교건물 등 ‘슬프고 겁에 질린 시대에 적합한’ 모습을 담아 탄광촌 사북을 증언했다.

■ 신군부의 계엄령이 내려진 80년 4월21일.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광부 5,000명이 경찰과 충돌하는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노조지부장이 회사와 단독으로 임금인상에 합의하자 광부들이 시위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경찰지프에 치여 부상하면서 유혈사태로 확산됐다. 결국 4일만에 정부와 광원대표가 사태 수습에 합의했으나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을 기다린 합동수사본부는 70여명을 연행해 혹독한 고문을 한 뒤 25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 사태의 발단은 어용노조와 경찰의 과잉 개입이었으나 본질은 광산촌의 절망적인 생존 환경이었다. 연간 200명이 사망하고 5,000명이 부상하는 탄광에서 목숨 걸고 일해온 광원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운 좋게 살아 남는다 해도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폐를 갉아먹는 진폐증이었다. 그러고도 임금은 최저생계비에도 훨씬 못 미쳤다. 이들의 투쟁은 암울한 유신독재에 신음하던 민중의 분노가 솟구친 80년 봄의 서막을 알린 셈이었다.

■ 사북 노동항쟁을 이끌었던 이원갑(66) 신경(64)씨 등 2명이 15일 민주화운동자로 인정 받았다. 5년 전 함께 명예회복 신청을 했던 조행웅씨는 2년 전 고문후유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폭도’의 오명을 자식들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다며 오랜 투쟁 끝에 힘겹게 얻어낸 것이기에 더욱 값지다.

하지만 사북항쟁 자체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 받은 것은 아니어서 명예가 완전히 회복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광부들의 사택자리에 강원랜드 카지노가 들어서는 등 오랜 침체기를 벗어나 고원관광 휴양도시로 변모를 꾀하고 있지만 사북항쟁의 그림자는 아직 가시지 않았다.

이충재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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