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무더위가 한창이다. 얼마 남지 않은 여름, 그 흔한 바다와 계곡이 아닌 좀 더 이색적인 곳에서 주말을 보낼 수는 없을까. 모처럼 즐기는 휴가인데 비라도 오면 어떨까 하는 걱정도 덜고 싶다. 더위와 비를 모두 피할 수 있는 곳, 동굴이다.
수억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형성된 신비의 공간이다. 느림의 미학이 빚어낸 환상의 세계이다. 하루 하루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오히려 애착이 간다. 어차피 휴식이란 느림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
동굴 여행의 또 다른 매력은 더위의 기세가 거셀수록 진가를 발휘하는 서늘함에 있다. 아무리 뜨거운 태양도 지하의 세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법. 그리스 신들의 제왕인 제우스신이 하데스신의 영역을 넘보지 못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연중 평균 온도는 10~15도 가량.
성능 좋은 초대형 에어컨이 쉴 새 없이 돌아가도 동굴의 시원함에 미치지 못한다. 서늘한 여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겨울에는 오히려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사계절 관광지인 셈이다.
한국의 동굴은 강원 남부 지역과 그 주변에 주로 분포한다. 이 중에서도 석회 동굴이 많은 편이다. 고생대에 퇴적한 석회암이 이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된 탓이다.
석회암은 빗물과 만나면 화학 작용을 통해 석회분이 녹아 거대한 구멍을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며 거대한 동굴을 만들어 냈다.
대부분 동굴에 폭포나 물 웅덩이가 많은 것도 여전히 빗물이 스며들기 때문이다. 동굴 인근에 수량이 풍부한 계곡이나 강이 자리잡고 있는 것도 이유이다.
볼거리를 원한다면 고수동굴이 추천할 만하다. 약간의 등산을 곁들여 보다 높은 강도의 서늘함을 느끼고 싶다면 환선굴이 제격이다. 보다 편하게 동굴을 관람하고 싶으면 용연동굴이나 화암동굴이 적당하다.
동굴의 질감을 좀 더 가깝게 느끼고 싶을 땐 고씨동굴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더위를 피할 용도라면 굳이 어느 동굴을 고집해야 할 필요는 없다. 동굴 입구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이미 여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글ㆍ사진=한창만기자 cmhan@hk.co.kr
■ 가볼 만한 동굴 여행 5選
◎ 환선굴(강원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
삼척은 동굴의 도시이다. 지금까지 이 지역에서 발견된 동굴만 54개이다. 대이리에만 30개가 넘는 동굴이 있다. 천연 기념물로 지정된 동굴도 8개.
환선굴, 관음굴, 제암풍혈(사다리바위 바람굴), 덕밭세굴, 큰재세굴, 양터목세굴 등 6개 동굴이 대이리에 있다. 모두 천연기념물 178호로 지정돼 있다. 하지만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는 동굴은 환선굴이 유일하다.
환선굴은 총 길이 6.2km로 동양 최대의 석회 동굴이다. 백두대간 자락인 덕항산 해발 500m지점에 자리한 터라, 구경을 위해서는 약간의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매표소에서 30분 가량의 등반. 짧지 않은 코스이지만 물 맑은 계곡과 불쑥불쑥 솟은 기암 괴석을 벗삼을 수 있다.
태백의 전통 통방아와 너와집 등 볼거리도 많아 눈이 즐겁다. 선녀(仙)가 환생(幻)한 굴이라는 이름에서도 느낄 수 있듯, 수많은 전설을 담고 있다.
덕항산 자락 촛대바위 인근 폭포에서 한 여인이 멱을 감고 있는데, 천둥 번개와 함께 산에서 바위더미가 쏟아지고 나서 여인이 사라졌다고 한다. 바위가 쏟아져 나온 곳이 지금의 환선굴 입구이다. 굴 입구에 서있는 커다란 엄나무는 도를 닦으려는 스님이 환선굴로 들어가면서 꽂아 둔 지팡이가 변한 것이라고 한다. 사연이 많으니 귀도 즐겁다.
동굴 내부는 또 다른 세상이다. 땅 속에 방대한 규모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내부의 폭만 20~100m에 달한다. 높이도 20~30m가 기본이다. 하지만 맨 땅을 밟을 수는 없다.
동굴 보호를 위해 모든 관람 코스가 철제 난간으로 조성돼 있다. 노화와 회춘을 반복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에 대한 당연한 조치다. 개방 구간은 1.6㎞ 가량으로 제한돼 있다.
석회암이 물과 융합하면서 생긴 석회 동굴이라 굴속에서 쏟아내는 물의 양이 엄청나다. 제 1폭포, 오륜폭포 등 6개의 폭포가 있다. 중앙 광장의 옥좌대, 동굴 입구의 만리장성, 도깨비방망이, 대머리석순 등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순과 종유석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다.
맹방해수욕장, 삼척해수욕장 등 해변과 덕풍계곡, 죽서루 등이 차량으로 30분 이내 거리에 있다. 성인 4,000원, 어린이 2,800원. 삼척시 대이동굴 관리소 (033)541-9266
◎ 고수동굴(충북 단양군 단양읍 고수리)
도담상봉, 옥순봉, 구담봉 등 단양은 경치가 빼어난 바위들이 일품인 고장이다. 하지만 동굴 속 세상이 더욱 아름답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적다.
고수동굴, 천동동굴, 노동동굴 등 소백산 자락을 따라 들어선 동굴 하나 하나가 놓치기 아까운 비경을 자랑한다. 이 중에서도 고수 동굴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규모에서는 환선굴이 최고라면, 경치로는 고수동굴이 으뜸이다.
찾아 가는 길도 쉽다. 충북 신단양 시가지에서 남한강을 건너면 바로 동굴입구와 만난다. 4억5,000만년에 걸쳐 형성된 석회암 동굴이다. 굴 입구에서 구석기 시대의 타제 석기가 발견돼 선사 시대 주거지였음을 짐작케 한다.
경치가 빼어난 데다, 다른 동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노화 현상이 없어 관광과 학술적 가치 모두 인정 받고 있다. 천연기념물 256호. 동굴 길이는 1.7㎞.
입구에 들면 옹석궁, 독수리바위, 창현궁, 마리아상 등 기기묘묘한 석순(동굴 바닥에서 솟은 생성물)과 종유석(동굴 천장에서 형성된 생성물)을 만난다. 삼각대를 세우고 사진을 찍으려고 하니, 안내원이 “안으로 들어가면 훨씬 볼거리가 많으니 괜한 수고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과연 그렇다.
중만물, 상만물상으로 이어지는 현란한 종유석 잔치에 벌어진 입을 좀처럼 다물기 어렵다. 떡 하니 입을 벌리고 선 사자바위는 고수동굴의 수호상.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이 어찌 이리도 정교한 지 놀라울 따름이다. 대형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을 연상시키는 황금주를 지나면 종유석과 석순의 만남을 앞둔 사랑바위가 기다린다.
불과 20㎝의 간격을 두고 떨어져있다. 하지만 이들이 1㎝를 자라려면 평균 10년. 앞으로 수백년을 기다려야 이들의 만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8월 한달 동안 오후 7시까지 입장이 가능하다. 도담상봉, 석문 등 단양8경과 온달산성, 천동ㆍ노동동굴 등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성인 4,000원, 어린이 1,500원. 고수동굴 문화재관리소 (043)422-3072
◎ 화암동굴(강원 정선군 동면 화암2리)
동굴만 보기엔 아쉽다면 화암동굴은 어떨까. 화암동굴은 일제 시대 다섯 손가락안에 들던 금광인 천포 광산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더 이상 금을 캐는 인부를 볼 수 없지만 당시 금광이 어떤 식으로 운영됐는지 알 수 있도록 테마 박물관을 조성해 놓았다. 금광과 동굴 두마리 토끼를 모두 구경할 수 있는 셈이다. 테마도 ‘금과 대자연의 만남’이다.
1.8㎞가량의 동굴 중 절반은 금薇같? 나머지는 석회암 절경 지대이다. 정선군이 카지노장을 유치하면서 지방세를 많이 걷어 들여서인지 관광 인프라 구축에 힘쓴 흔적이 역력하다.
매표소에서 동굴 입구까지 20분 이상 걸어야 했으나 지난 해 모노레일 카(성인 2,000원, 어린이 1,000원)를 설치, 관광객들이 보다 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입구 초입은 역사의 장이다. 천포광산 개발 당시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실제 금광맥과 채굴 흔적도 볼 수 있다. 관람객이 재연 부스 앞에 서면 센서가 작동, 모형 광부들이 움직이며 설명을 해 준다.
365개의 수직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대자연의 신비와 만난다. 동양 최대의 유석폭포, 대형 석순과 석주, 장군상 등 볼거리가 많다.
금 생성 과정에 대한 모든 것을 전시한 금의 세계와 금광개발과정을 동화적으로 연출한 동화의 나라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아이템. 동굴을 나서면 인근에 거북바위, 화암약수, 소금강, 몰운대 등 화암8경이 펼쳐지고, 정선5일장(2,7장)과 아우라지도 가까이 있어 이어서 구경하기에 적합하다. 성인 4,000원, 어린이 2,000원(모노레일카 별도). 정선군 시설관리공단 (033)560-7062
◎ 용연동굴(강원 태백시 화전동)
용연동굴은 백두대간 금대봉 하부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해발 920m로 국내에 공개된 동굴로는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미공개 동굴 중에서는 삼척의 덕밭 세굴(970m), 양터목 세굴(950m)이 더 높다. 동굴이 높은 까닭에 매표소에서 동굴 입구까지 무궤도 꼬마 열차(트램카)가 운행한다. 오르는 길이 아름답다. 봄이면 벚꽃이, 여름에는 신록이 길 옆으로 우거진다.
동굴의 총길이는 843m. 4개의 광장과 2개의 수로가 있다. 일부 구간은 성인이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낮다. 입구에서 지급하는 헬멧을 착용하지 않으면 바위 천장에 머리를 부딪힐 염려가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국내 다른 동굴에 비해 인공적으로 조성한 흔적이 많은 편. 동굴 대형 광장에는 음악에 맞춰 춤추는 리듬 분수대가 설치됐고, 화산 모형 분수대와 일반 분수대도 있다.
종유관, 종유석, 석순, 동굴산호 등 다양한 동굴 생성물이 자라고 있다. 백색, 갈색, 흑색 등 색깔도 다양하다. 동굴 생물도 40여종에 달한다.
이따금 천장에 붙어 사는 관박쥐를 볼 수 있으며, 긴다리 장님 좀먼지 벌레는 용연동굴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 생물이다. 검룡소(한강 발원지), 황지(낙동강 발원지)도 멀지 않다. 성인 3,500원, 어린이 1,500원. 용연동굴 관리사무소 (033)550-2729
◎ 고씨동굴(강원 영월군 하동면 진별리)
영월의 서강과 동강이 만나 단양으로 흐르는 남한강 줄기 위에 자리 잡은 동굴이다. 임금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뒤 죽음을 당한 단종의 혼령이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에서 노리곡(魯里谷)동굴로 불렸다.
고씨굴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때 고종원 일가가 이 곳에 피신, 거주한 데서 유래했다. 지금도 고씨 일가가 거주하면서 밥을 짓기 위해 솥을 걸고, 밥지을 때 불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다.
동굴의 길이는 6.3㎞. 4억년전부터 형성된 종유석의 생성 과정이 쭉 펼쳐져 있는 천연기념물 219호다. 4개의 호수, 3개의 폭포, 6개의 광장을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로가 좁은 데다, 입구와 출구가 같아 관람하기에는 조금 불편한 점이 있다. 일부 구간은 엉금엉금 기어야 할 정도로 높이가 낮다. 입구에 마련된 헬멧을 반드시 착용하는 것이 좋다.
사천왕, 종류폭포, 님의 기둥, 오작교, 오백나한, 극락폭포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은 편. 고씨동굴 아래 강변은 래프팅 코스로 유명하다. 쉴 새 없이 출발하는 래프팅 행렬이 장관이다.
강을 거슬러 오르면 청령포, 선돌, 선암마을(한반도 지형 마을) 등 영월의 대표적인 명소가 늘어 섰다. 성인 3,000원, 어린이 1,500원. 고씨동굴 관리소 (033)370-2621.
글ㆍ사진=한창만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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